“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때를 지내리라”(단7:25).
성도들의 작은 뿔의 권세 하에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내리라고 한 이 예언에서 과연 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얼마의 기간을 나타내는가? 이 가간에 대해서는 문자적인 3년 반, 알 수 없는 영적인 시간, 그리고 1,260년을 나타낸다는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
먼저 여기 “때”라는 단어는 아람어 이단(ו)으로 그 문자적 의미는 “해”(year)이다. (다니엘서는 2:4부터 7:28까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는 다나엘 4장에서 느브갓네살이 짐승처럼 지냈던 기간인 “일곱때”를 나타내는 데 4번이나 사용되었다(단4:16,23,25,32). 이 단어가 “해”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니엘 11:13의 “몇 때 곧 몇 해”에서 분명해진다. 이말은 히브리어로 하이팀 샤니임(םי םי) 인데, “때”라는 히브리어 에트(ת)는 아람어 이단(ו)과 동의어 이고, 샤니(ה)문자 그대로 “해” 이다. 그러므로 다니엘7:25의 “한 때 두 때 반 때” 곧 “한 해 두 해 반 해”를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다니엘과 같은 묵시적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에 같은 기간이 또 한번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12:14은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때를 양육 받” 는다고 하였다. 또한 요한계시록 12:6은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하였다. 이 두 성경 절은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애용을 전하는 두 성경 절에서 시간 요소만 “한 때 두 때 반 때” 와 “1,260일”로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이두 시간 단위는 같은 기간에 대한 다른 표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때 두 때 반 때” 즉, “3년 반”을 개월 수고 바꾸면 42개월이고, 다시 그것을 한 달 30일을 계산하면 1,260일이 된다.
이 세 시간 단위는 모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다(계11:2,3; 12:6, 14).그러므로 이와 같은 환산은 성경 자체 속에서 1,260일로 환산된 “한 때 두 때 반 때”는 과연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가?
성경 예언에서 시간 요소를 해석하는 방법론 중에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하나의 원칙이 소위 예언상의 하루를 일년으로 해석하는 “연-일 원칙”(year-day principle)이다. 이 원칙은 터툴리안(Tertullian)이나 클레멘트(Clement)간은 교부들로 시작하여 모든 세기마다 중요한 학자들에 의해 예언 해석에 적용되었다.
중세에도 이 원칙은 계속 지켜졌고, 종교개혁 시대에도 마르틴 루터(Marthin Luther), 존 녹스(John Knox), 멜란히톤(Melanchthon), 등에 의해 1,260일, 1,290일, 1335일 의 상징적 예언에 적용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물리학자요 신학자였던 아이작 뉴톤(Isaac Newton)도 이 원칙을 적용하여 2,300주야는 2,300년이며, 70이레는 BC 457년에 시작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요한페트리(Johann P. Petri)도 이 원칙을 적용하여 70주야가 바로 2,300주야를 계산하는 열쇠이며, 기 기산점은 BC 453년이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커님햄(Willinm Cunningham)이 원칙에 근거하여 70주야와 2,300주야의 기산점을 BC457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같은 기간에 미국 장로교회 총회 의장이었던 조슈아 윌슨(Joshua L. Wilson), 개혁 감독 교회 주교였던 존헨쇼(John P. K. Henshow), 그리스도의 제자들 이란 교단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예일 대학의 총장인 티모디 드와이트(Timothy Dwight), 유니온 대학의 총장인 엘리팔리트 노트(E, Nott), 오하이오 대학의 총장인 조오지 정킨(George Junkin)등이 이 원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해석법은 19세기에 고조된 세계적인 재림운동과 함께 다시 한번 크게 강조되고 회복되었다.
이렇게 성경 예언에 있어서 일일을 일년으로 계산하는 해석법이 교회사에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다음과 같은 뚜렷한 성경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 연-일 원칙은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적용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이다. 기본적으로 안식년이란 안식일의 “일”을 “년”으로 환산한 제도이다(레 25:3-8 참조). 즉, 안식일로 끝나는 주일 중 매 일(day)은 7년 주기의 매 년(year)을 나타낸 것이었다. 아마도, 이런 영향이었는지 라반은 라헬을 얻으려는 야곱에게 신혼 생활 “7일을 채우라”고 한 후에, 그 수만큼 “7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창 29:27)고 하였다.
둘째, 이 원칙은 구약의 역사적 예언에 적용되었다. 출애굽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불신을 나타내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땅을 탐지하는 데 걸린 40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민 14:34) 40년 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범죄한 횟수만큼 40일 동안 누워있으라고 하면서, “일일이 일년이라”(겔4:6)고 하셨다. 이 두 경우 모두 하루가 일년으로 환산된 것이다.
셋째, 이 원칙은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예언에 적용되었다. 묵시적 예연은 상징성을 그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과 요한계시록 12장의“여자”는 모두 상징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예언 속에 나타난 시간 단위도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요한계시록 11장은 두 증인이 “1,260일”(3절) 즉, “3년 반”동안 예언하고 죽임을 당하여 “3일 반”(9)절 동안 사자를 지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비록, 같은 상징적 예언이지만, 이 기간은 연-일의 비율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9절의 “3일 반”은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3년 반”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3절의 “1,260일도” “1,260년”으로 환산되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모든 구절이 조화를 이루려면 이 연-일 원칙을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넷째, 이 원칙은 다니엘서의 예언에 적용되었다. 다니엘서의 예언은 2장, 7장, 8장, 11장에 4중으로 병행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2장의 예언은 금 머리인 바벨론에서 돌 나라 재림까지 이어지며, 7장의 예언은 사자인 바벨론에서 작은 뿔의 전횡 기간인 “한 때, 두 때, 반 때”를 거쳐 인자가 아버지 앞에 나가는 때까지 이어지며, 8장의 예언은 수양인 페르시아부터 2,300주야를 거쳐 마지막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7장의 “한 때, 두 때, 반 때”와 8장의 “2,300주야”는 바벨론-페르시아 시대로부터 마지막 시대에 이르는 그 긴 기간의 어느 역사적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다니엘 8장의 “이상”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하존 인데, 이 하존 이란 말은 1절부터 14절에 묘사된 “전체로서의 이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 이상 속에는 페르시아와 헬라뿐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세력의 모든 통치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2,300주야는 결코 6년 4개월이 아니라, 그 모든 기간을 포함하는 긴 기간이어야 한다. 이것은 연-일 원칙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다니엘 8장의 2,300주야에 관한 이상과 다니엘 9장의 70이레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다니엘 9장의 70이레는 근본적으로 다니엘 8장의 2,300주야를 해석하기 위해 주어진 이상이다. 그런데, 다니엘 9:25의 “70이레”를 490일로 해석하는 주석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70이레가 490년이라면 2,300주야도 2,300년이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서는 그 자체적으로 이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4중 예언에서 마치 7장의 예언이 2장의 예언의 확대인 것처럼, 11장의 예언은 8장의 확대이다. 더 나아가 11장의 예언은 8장의 상징적, 묵시적 예언을 역사적, 문자적 예언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 8장에 나타난 유일한 시간단위는 2,300일(day)이고, 다니엘 11장에 나타나는 시간 단위는 “해(year)”이다(단11:6, 8, 13). 그러므로 상징적 예언 상의 “날”은 곧 역사적 예언 상의 “해”인 것이다.
사실, 철학적으로 생각해도 예언 해석에 있어서 이 연-일 원칙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대한 넉넉한 신뢰감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 해석 원칙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승천 이후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때까지 그 긴 역사의 모든 기간 동안 그의 배경을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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