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일반

[스크랩]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생애

춘천 김상호 2009. 8. 17. 06:57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생애
 
  1)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생애.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독일 부란데베르그 지방의 스탈찌델빠이 구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푸러시아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루터파 교회의 경건한 가정에서 성장한다.  
  틸리히는 1904년 베르린대학에 들어가 튀빙겐대학과 할레대학에서 공부하고 1912년 할레대학의 신학교수가 된다. 그 해 루터파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으로 그는 군목에 입대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베르린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5년간 신학강의를 한다. 1924년에는 말버어그 대학에서, 1926년에는 드렌스텐 대학에서, 1929년까지는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1929년부터는 프랑크폴트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봉직하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자 그는 해임이 되고 라이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가 된다. 1954년까지 강의를 하다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고 1962년에는 시카코 신학대학의 신학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1968년 10월 23일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프로테스탄트 시대" "존재에의 용기" "조직신학" 등이 있다.       
 
 
  2) 폴 틸리히의 신학.
 
  (1) 신관
 
  틸리히의 신론은 존재자체(存在自體)의 신관이다. 신은 존재자체(存在自體)다. 신이 존재자체가 아니고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가 비록 최고자라고 하드라도 상대적 존재(相對的存在)에 불과(不過)하게 된다.
  신이 신이 되려고 하면 신은 존재자체(存在自體)이거나 존재기반(存在基盤)이거나 존재 원동력(存在原動力)이어야 한다.
  신은 존재자체이므로 존재자체로서의 신은 신의 본질과 신의 실존의 구별할 수 없다. 그래서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변천이 신에게는 없다. 존재로서의 능력이 되는 신은 모든 존재를 초월해 있고 또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된다.  
  신은 자아(自我)나 세계라는 개념을 통하여 포착할 수 없다. 우리는 신을 자아(自我)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신을 `자아(自我)`라고 한다면 `비자아(非自我)와 대응적관계(對應的關係)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절대자가 될 수 없다.
 
  또 신은 초월적인 신이시기 때문에 신이 세계가 될 수가 없다.
  신은 또한 인격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인격자가 된다면 다른 모든 인격자들의 기반(基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완전무한(完全無限)한 천상적(天上的)인격자라고 한다면 신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될 수 없다.   
  인격이란 말을 반대할 수 없으나 인격신을 긍정할 수는 없다. 신은 신 이상(以上)의 신이기 때문에 신학적 유신론의 신을 초월하여 있다. 신학적 유신론의 신은 존재는 되어도 존재자체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개념이 생긴다. 그러면 신은 절대자가 될 수 없다. 신은 신 이상의 신이심으로 인격일 수 없다. 결국 신은 초인격적이다.
 
  ☞ 신관에 대한 반증
 
  틸리히는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다가 신의 인격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신론(Deism)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신은 인격적인 신이시다. 하나님은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손과 발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보았다고 하였다. 귀가 있어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었다고 하였다. 또 손이 있어서 붙들겠다고 하였고, 발이 있어서 가까이 오시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지, 정, 의가 있어서 사람처럼 알고, 느끼고, 행동을 하신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인간은 인격적인 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초연적(超然的)이며 인격적(人格的)이므로 인간은 양자를 인간이성(人間理性)으로 합리화하려고 하지 말고 긍정하여야 한다.    
 
  (2) 종교관
 
  틸리히는 실존적(實存的)종교관을 피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즉 말씀이 실재가 되었다, 이는 옛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실재적(實在的) 계시임을 의미한다.
  태초에 말씀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는데 이 동일한 말씀이 육신이라고 하는 새로운 존재로 변모하였다. 이 "새 존재"는 전혀 새로운 창조의 존재가 아니다. 본래 있던 옛 존재이다. 그러나 육신화(肉身化) 되어지는 실존의 새 존재가 되었다
  변모된 이유는 화해(和解)에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옛 존재가 새 존재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새 존재에 대한 구원은 세상이지 기독교인만의 것은 아니다. 새 존재의 출현은 인간전체에 대한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종교란 영적 생활의 특이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적 모든 기능의 차원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적 생활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종교란 궁극적 관심이다.    
 
  ☞ 종교관에 대한 반증
 
  화해(和解)를 위한 "새존재관"의 수립(樹立)은 인정이 되지만 구원이 만인에게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만인득구설(萬人得求說)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패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구원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택자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능력에 하자(瑕疵)가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완전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효적(實效的)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보혈의 가치는 택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완전 수납되었다.
 
  (3) 문화관
 
  틸리히의 종교는 모든 문화적 표현의 근원이며, 종교표현양식은 문화론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종교와 문화는 상호 예속되며 양자(兩者)는 분리될 수 없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신인간의 본질적인 차이(差異)로 신인간의 상봉은 우연적(偶然的)이라고 하지만 종교와 문화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인간의 만남은 우발적이 아니라 자연적인 귀결이다.
  신은 인간를 초월하여 분리될 수 없으며 종교와 철학은 화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화해는 헤겔(Hegel)식의 사색에 의한 화해도 빠르트 식의 신앙에 의한 화해도 아니고 실존적화해(實存的和解)를 의미한다.
 
  ☞ 문화관에 대한 반증
 
  ① 틸리히는 문화의 근원이 종교라고 한 것은 타당하지만 종교와 문화를 동등(同等) 동일시(同一視)한 것은 잘못이다(어느 국가든지 그 나라의 문화는 어떤 종교를 섬기느냐에 따라 나타나며, 국가가 선진국인가 후진국인가 결정된다).
 
  ② 종교와 세속을 동화(同化)함으로써 종교적 신성(宗敎的神性)을 오염시켰다.
 
  ③ 신은 인간을 초월하여 분리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신은 독립하여 존재하며 의존적(依存的) 상대적(相對的)이 아니다.
 
  ④ 종교와 철학은 화해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종교는 감정적 직관의 무리수이며, 철학은 이성적 논리의 유리수이므로 화해가 불가능하다.
 
  (4) 성경관
 
  틸리히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시인할 수 없으니 무한자인 신이 직접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한자는 유한자를 초월하기 때문에 무한자는 유한자에게 상징과 비유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징과 신학은 종교언어의 최상의 형태이며 참된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실재에 참여한다.
 
  상징은 계시의 매개물이다. 그런데 상징은 발달과 소멸이 따른다. 동정녀 출생은 강력한 상징이지만 현대인에게는 그것이 정당한 상징으로 수락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는 새로운 수락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 성경관에 대한 반증
 
  문자적 해석은 부인하면서 문자로 된 상징은 시인하는 것은 모순이다.
  성경은 허위에 무지한 정직이므로 비유적 모조품이 될 수 없다. 상징과 역사적 사실과는 부동의 상극이기 때문이다.
 
  (5) 기독관
 
  ① 예수의 그리스도화
 
  틸리히의 기독론은 신학의 핵심이다.
  실존속으로 뚫고 들어옴으로(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 나타난 새존재는 새존재의 능력으로 실존을 뚫고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인 자신을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희생시켰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가 된다.
  예수는 자신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와 결합되었으므로 그는 참인간이 된 것이다. 다른 어떤 점보다도 본래적인 예수 자체가 그리스도를 만드는 것이다. 예수의 인격이나 교훈이나 행동 등은 예수의 존재, 즉 그리스도의 원인이 아니고 표현이다. 그런즉 예수의 유한한 자아를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일화, 비유, 교훈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궁극적 지체가 표시되는 것이다.
 
  ☞ 예수의 그리스도화에 대한 비판
 
  예수를 그리스도화 한 것은 타당하지만 인격화의 부정은 부당하다.
  사실을 외면한 신학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육신화된 예수자체가 그리스도 자신이지 인간이 된 예수가 우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② 우주적 관건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해석해 줌으로써 결국 거룩과 속됨이 분리될 수 없다.궁극적 실재의 힘은 역사적 자체의 힘이 되는 것이다.
 
  ☞ 우주적 관건에 대한 반증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성(聖)과 속(俗)의 일치로 본 것은 성(聖)과 속(俗)의 혼돈을 의미한다. 궁극적 실재의 힘과 역사적 자체의 힘을 동등시한 것은 무한과 유한의 일치를 말한다.  
 
  ③ 치유적 기능
 
  구원이란 부서진 것을 다시 회복함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회복이요 치유다. 기독교가 언급하는 치유는 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치유된 것을 의미한다.
 
  ☞ 치유적 기능에 대한 반증
 
  구원과 치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원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차원이요, 치유는 사망이전의 한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을 치유의 선(Line)으로 보는 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격차의 착각이다.
 
  ④ 사랑의 능력
  새존재의 능력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에는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의 종류로 구분되지만 이것들은 다 하나의 사랑의 여러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 사랑의 능력에 대한 반증
 
  틸리히는 속화사상에서 사랑의 종류를 혼돈하였으나 각 사랑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에로스(    )는 이성간의 횡적 사랑이요, 필로(    )는 진리를 추구하는 수직의 상승적 사랑이요, 아가페(     )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강(下降)의 사랑이다.
  이 여러 사랑은 성질상으로는 동질의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차원이 다르다.
  에로스는 횡적이요, 필로는 상승이요, 아가페는 하강이다.  
  에로스는 감정적 직관이요, 필로는 이성적 사색이요, 아가페는 영적 선물이다.
  에로스와 필로는 인간이 성장하면 정서와 지성이 자발적으로 생성하지만 아가페는 성령으로 거듭나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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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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