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계에 있는 실존과 경계에 있는 사상
1. 권위적 신앙과 진취적사고의 갈등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동부독일 브란데부르크주의 작은 마을 쉬타르 헤텔에서 1886년 8월 20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베를린에서 목회하게 된 부친을 따라 베를린으로 이사와 여기서 중고등교육을 받게 된다. 그의 어린시절은 성격이 우울하고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부친과 진취적이고 민주적인 모친 사이에서 삶의 균열 (Zwiespalt)을경험한다. 이러한 균열이란 부친의 동독적인 성격과 모친의 서독적인 성격(Rheinland)사이의 갈등만 이 아니다. 양친의 교회적 신앙과 문화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그의 사고 사이의 갈등이었다. 1 틸리히는 루터적인 전통 속에서 보수적으로 양육되었으나 점차 이 전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틸리히는 1904년 가을학기 베를린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했고 튀빙겐, 할레대학에서 공부하고, 베를린-브란덴부르 크 교구에서 신학 졸업시험을 마치게 된다. 그는 피히테의 학문들과 칸트의 비판 사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쉘 링만이 틸리히가 제기하는 열정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게 된다. 쉘링의 통일철학은 틸리히에게 사고의 제목을 부여한다. 틸리히는 1910년 브레스라우대학에서 쉘링의 긍정철학에 있어서 종교사적 구성, 그 전제와 원리(Die religionsgeschichtliche Konstruktion in Schellings Positiver Philosophie, ihre Vorausetzung und Prinzipien) 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1911년 그는 할레대학에서 쉘링의 철학적 발전에 있어서 신비주의와 죄의식 (Mystikund Schuldbewutsein in Schellings Positiver Philosophischer Entwicklung) 이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 신학박사 학위 논문에서 틸리히는 다음 명제에 도달한다. 진리와 도덕성, 신비주의와 죄의식의 통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2 진리와 도덕성(Sittlich keit), 신비주의와 죄의식 (Schuldbewatsein)은 그의 사고의 극(極)들로 머문다. 틸리히는 이 극들을 종합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틸리히의 문화신학적 사고가 잉태된다. 틸리히는 1916년 할레대학 신학대학에서 초자연적인 것의 개념 (Begrift des Ubernaturlichen) 이라는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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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켈러의 의인(義認)사상에 영향 받음
1.할레시절에 만났던 친구들과의 신학적 토론은 틸리히의 전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친구들, 샤프트 (Hermann Schafft)와 프리츠(Alfred Fritz)는 마르틴 켈러(Martin Ka hler)에 의해서 영향받은 자들이었다. 당시 베를린 신학대학과 마아르부르그 신학대학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할레신학대학의 신학적 주도 인물인 켈러 의 근본입장은 의인사상이었다. 켈러는 의인의 개혁주의적 통찰을 성서적 예언자들의 선포와 성서적 그리스도 중심선포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 켈러의 의인사상은 틸리히 사상의 출발점이 된다.
2. 틸리히는 의인 착상이 이 당시 유행했던 변증법적 신학 착상을 능가한다고 보았다. 틸리히에 의하면 변증법적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 속에서 자라난 자들에 대해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재난-경험의 표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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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틸리히는 변증법적 신학의 부정적 역설로 끝나는 것을 비판하면서 긍정적인 역설을 주장한다. 긍정적 역설의 기 반이란 의인의 착상이다. 인간이란 신에 의해서 절대적으로심판받고 절대적으로 용납되었다는 착상이다. 틸리히는 이 의인의 착상에 입각해서 신을 이 세계 연관으로부터 초절적으로 분리시키는 변증법적 신학의 초자연적 입장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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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틸리히는 켈러의 제자로서 성경에 대한 역사비판적인 작업을 결단코 경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틸리 히는 자유주의신학과 결별하면서 또한 정통주의적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새 방식의 변증학의 정초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 새 변증학의 착상은 틸리히의 스승 켈러의 입장에 서있다. 켈러는 그의 주요 저서 기독교 교리학 (Wissenschaft der Christlichen Lehre) (1883)에서 의인하는 신앙의 전제란 기독교변증학 (Christliche Apologetik)이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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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틸리히는 그의 새 변증학의 목표란 신앙진리와 세속이성의 체계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본다.
- 6 틸리히는 이 새 변증학에 의해서 현대 지성인들 사이에 영향력을 상실하는 신앙진리가 이 세속이성을 향해 타당하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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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쉘링 사상의 영향
1913년 12월 틸리히는 조직신학 72입론 (Systematische Theologie 72 Thesen) 을 구상했다.7 이 입론은 신학을 쉘링적인 사유의 원리 위에 정초시키고 있다. 사유와 진리의 절대적 동일성 속에서 사유는 직관으로서 개념을 정립한다. 여기서 절대적 출발점인 직관(Intuition)은 모든 체계의 기반이다. 이 기반에 대하여 상대적인 관점인 반성(Reflexion)이 마주 서 있다. 이 상대적 관점에서 모순(der Widerspruch)이 지배한다. 이 상대적 관점의 끝은 원리적인 의심이다. 이 상대적인 관점에 신학적 관점인 역설(das Paradox)이 들어선다. 이 신학적 관점의 근본 입장은 역설로서의 의인(die Rechtfertigung als Paradox)이다. 의인이란 일정한 개별관점을 동시에 절대적으로 부인하고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신의 판단 이다. 이 판단이 절대적으로, 전제 없이 판단된 것 속에서 일어나는 한 에 있어서 그것은 예정(Pra destination)이다.8 여기서 틸리히는 그의 스승 켈러가 제시한 구체적인 죄인의 용서라는 구속사적인 의인 개념을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이라는 쉘링적인 동일철학의 추상적 개념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이 시기에 틸리히는 후기 쉘링의 적극적 철학(Positive Philosophie) 을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은 그를 헤에 겔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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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실존주의로의 전향과 종교사회주의 사상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틸리히 사상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에게 있어서 19세기 시민문화와 삶의 방식, 자유주의신학과 관념주의적 사고가 붕괴하고 존재론적 의인 사상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세계대전에 틸리히는 4년간 군목으로 참여하고 전쟁의 참혹상을 체험한다. 베드룬전투에서 그의 주위에 죽고 죽어가는 병사들 가운데서 틸리히는 실존주의자가 된다. 이 밤에 나는 실존주의자가 되었다. 제1차대전은 틸리히에게 우리 실존 심연의 경험 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을 통한 심연체험 (Abgrunderlebnis) 과 의인사상(Rechtfertigung)은 앞으로 틸리히 사상의 기초가 된다.10 틸리히는 20세기를 세계대전의 시대로 파악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시대의 폭풍은 어떤 몇몇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우연히 야기된 것이 아니라 19세기와 20세기 시민적 사회의 구조와 경향에 의해 초래된 구조적 필연성이었다.
1920년대 틸리히는 종교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된다. 전쟁 후 틸리히는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신학사강사(Privatdozent)가 된다. 1924년 그는 아아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의 비정규교수가 되고 1925년 드레스덴의 공과대학 종교학 교수와 동시에 라이프찌히 대학의 신학명예교수가 된다. 그리하여 그의 강의는 신학을 넘어서 철학과 문화까지도 다루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문화철학적 활동은 1929년 틸리히가 프랑크푸르트 대 학에 막스 쉘러(Max Scheler)의 후임으로 철학과 사회학 교수로 청빙받을 때 더욱 강력해진다.
틸리히는 1933년 비유대인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히틀러에 의해서 면직 당하게 된다.
- 첫째 이유는 그의 저서 사회주의적 결단(Die sozialistische Entscheidung) 에서 틸리히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아주 비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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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째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 학생연맹의 테러에 대항한 유대인 학생들의 입장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틸리히는 라인홀드 니버의 주선으로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18년 이상 교수를 하며, 콜럼비아 대학에서 철 학 강의를 하게 된다. 1955년 은퇴후 미국에서는 소수에게만 부여하는 최고의 학문적 명예가 그에게 부여된다. 틸리히는 언제든지 그가 원하는 내용을 강의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하바드의 대학교수(University Professor of Harvard) 가 된다.
틸리히는 히틀러 시대와 전쟁 시기에는 독일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과 영국권에서는 교회와 신학을 넘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에 틸리히는 유럽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그는 유럽과 미국, 영어와 독일어라는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머물렀다. 틸리히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 동안 구라파에서의 초빙강의 이외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게 된다. 1966년 2월말 틸리히는 뉴욕 소재의 사회연구 신대원(School of Social Research in New York)에서 새 강의활동을 개시하고자 계획했었다. 그의 첫 강의제목은 정치적 이념의 종교적 차원(Die religio se Dimension der Plitischen Ideen) 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 틸리히는 1965년 10월 22일 시카고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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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경계에 있는 사상
1936년 자서전에서 틸리히는 그의 삶을 경계에 있는 현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는 항상 삶의 경계에서 살았고, 지나감, 긴장, 투쟁을 경험했다. 이 긴장은 그에게 신앙의 동력(Dynamik des Glaubens) 을 형성한다. 그의 사상은 그의 삶의 숙명처럼 신학과 철학과, 교회와 사회, 종교와 문화, 관념론과 마르크스론 사이의 경계에 서있다. 틸리히는 이 분리된 것을 연합하고자 하였다,11 이 양자는 배타적인 대립 속에 있지 않고 내적인 변증법의 관계 속에 있다. 이 분리된 것을 조합하고자 하는 틸리히의 사상 속에서 교육적 사고의 배타성이 깨어지고 세속성의 한 가운데서 존재의 종교적 깊이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는 문화신학적 착상이 싹트게 된다.
틸리히의 사상은 일평생 경계에 있는 사상 (Denken anf Grenze)이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틸리히는 경계의 개념이 나의 전인격적이고 정신적인 발전에 대한 상징이기에 적합하다 고 피력한다.12 그는 일평생 철학자로서 신학을 추구했고, 신학자로서 철학을 추구했다. 그는 이러한 그의 생애를 다음같이 피력한다. 내가 향하고 있는 교수직의 유별난 이름은 철학적 신학(Philosophische Theologie)이다. 철학과 신학 사이의 경계선이 나의 사고와 작업의 중심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표시보다 더 나에게 적합하다.13 나는 파스칼에 대해 말한다: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다.14 틸리히의 삶과 실존이 경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는 종교적 차원을 상실한 이 시대에 경건한 사상가(ein frommer Denker) 이었다.15 따라서 틸리히는 바르트와 불트만과는 달리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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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개신학의 착상-제3의 길
1. 진리와 역사상황적 성격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역사를 실존적으로 만남으로 써 역사는 틸리히 사고의 중심주체가 된다. 틸리히는 역사비판적 문제 설정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역사를 다루지 않고 모든 역사적 현실 일반의 의미와 본질이라는 넓은 영역에서 역사를 다룬다. 상황을 해석(Deutung)뿐 아니라 형성(Gestaltung)까지도 요구했다.1 틸리히 사상에는존재론(Ontologie)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론은 정태적이 아니다. 실존론적 역동적(existential dynamisch)인 성격을 갖고 있다.2 그에 의하면 모든 본질은 실존으로 오기를 원하고 시간과 숙명으로 침입하기를 원한다. 진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념처럼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으로 들어온다.
이념과 실존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진리 역시 실존처럼 숙명 속에 처해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그 스스로 숙명 속에 있는 자만이 진리를 인식한다. 틸리히는 철학과 숙명(Philosophie und Schiksal) 이라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로고스는 카이로스(Kairos) 속으로 수용되며 진리는 실존의 숙명 속으로 수용된다. 어떤 점에 있어서도 단지 로고스(Logos)만이거나 카이로스만이 아니다3 틸리히는 진리의 모든 인식이 역사적이며 결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한다. 진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때문에 진리는 단 한번만에 궁극적으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실현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모든 역사적인 순간의 계명과 약속 아래서 항상 새로운 모험을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 개념의 파악에 있어서 바르트와 틸리히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한다. 바르트가 삼위일체의 영원한 관계를 파악하려고 하고,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과 순수성과 불변성을 주장한데 반해서, 틸리히는 현실의 깊이와 역사의 끊임없는 교차 속으로
- 나아가 기독교 진리의 다양성(Variabilita t)을 우리시대와 세계의 변천하는 상황 속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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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새로운 용어
틸리히는 현대의 상황 속에서 교회의 용어가 현대인들에게 너무나도 권위주의적이고 고답적이어서 현대인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용어 그리고 그 분량에 있어서 성서적 용어 조차도 우리의 역사적 상황의 현실로부터 아주 멀어진다 , 교회와 성서의 용어는 그 목소리를 상실했다.4 성서와 교회 전통의 중심 내용인 하나님, 그리스도, 교회와 계시조차 현대 지성인들 뿐 아니라 신학자와 비신학자들 가운데 회의가 되어 버렸다.
전통 교회의 선포는 현대인들에 의해 거부당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가 구체적인 상황을 외면하고 전통적인 언어로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상황 속에 선포되고 상황의 깊이로부터 말해지는 참된 신적 진리를 요구하고 있다. 5틸리히는 현대인들에게 신학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선 새로운 언어와 개념을 창출해 내어 야 한다고 피력한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이전에 당신은 먼저 개념을 구출해야 한다.6 새로운 언어와 개념 의 창출이란 틸리히에 있어서 정서와 의식어(儀式語)의 종교적 원언어를 현대적 언어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불트만의 비신화론화 시도처럼 항상 좌초되었다. 틸리히는 이러한 새 개념도구의 창안을 통해서 옛 상징들과 옛 단어들을 현대적 상황을 향해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틸리히는 깊이의 차원과 신에 대한 개념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인을 향하여 신이라는 단어의 놀라운 능력을 새로이 이해시키고자 한다. 틸리히는 신의 이름에 대한 인간의 오용을 방지하기 위해 신의 신성, 신의 초월성을 보존하고자 한다. 그래서 틸리히는 신에 관한 용어로서 존재자체(Sein selbst), 존재의 힘(Macht des Seins),존재의 근거와 의미(Grund und Sinn des Seins), 깊이(Tiefe), 절대자(das Absolute), 무제 약자(das Unbedingte) 등의 새로운 단어를 창출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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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리히에 의하면 이 용어들은 대용 개념이 아니라 신 이름의 지성소를 향한 닫힌 문을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여는 열쇠이다. 그리고는 이 열쇠는 버려진다.7 그러한 새로운 정형화없이 틸리히에 있어서 신학적 체계를 발전시키는 것 은 부질없는 일이다.8 진리는 항상 시간 속에서 야기하고, 로고스는 카이로스 속에서 야기하기 때문에 신학은 끊임없이 영원한 진리와 구체적인 시간 상황이라는 양극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신학적 진리가 야기하는 상황(Situation) 이란 인간의 창조적 자기이 해의 총체가 수행되는 구체적 시간을 말하며 로고스가 야기하는 카이로스란 영원자의현존을 받아들이고 유한자의 무제약자에 대한 개방성이 실현되는 역사적 순간을 말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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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학의 과제-중재직
틸리히는 신학의 과제를 중재직(Mittlerdienst)으로 이해한다. 이 중재직이란 그리스도인 예수의 상속에서 직관 될 수 있는 진리의 영원한 기준, 그리고 개인, 단체들이 현실에 대해 갖는 변천하는 경험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다.
신학의 중재 과제가 거부된다면 신학자체가 거부된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단어는 신(Theos)인 신비와 로고스 (Logos)인 이해 사이의 매개(Vermittlung)를 내포하기 때문이다.10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모든 매개하는 시도에 대해서 강한 부정을 선언하는데 반해서 틸리히의 매개신학 (Vermittlungs theologie)은 신과 세계, 신학과 철학, 기독교와문화, 신앙과 이성을 연결시키고, 화해시키고, 매개 하고자 한다.11 변증법적 신학이 신과 세계를 건널 수 없는 간격(Diastase)속에서 서로 분리시켜서 양자의 어 떠한 접촉점도 인정치 아니한데 대해서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은 신과 세계를 일치화시키는 종합을 시도하여 양자 의 경계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신인동형주의로 나아갔다.
여기서 틸리히의 매개신학은 양타입의 신학의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다. 나의 신학은 신학의 두 가지 유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표시 속에서 표현된 양자택 일이란 타당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12 여기서 틸리히는 변증법적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을 넘어서는 제 삼의 길(der dritte Weg), 곧 종합의 길을 제창한다. 그의 종합의 길이란 바르트가 제창한 교의학적 신학이 아닌 후기 쉘링이 추구했던 철학적 신학이었다. 종합의 길이란 나의 고유한 길이었다. 이 길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고전 독일 철학자를 따랐고 모든 나의 철학적 작품 속에 있어서 추진력이었다.13 이 종합의 길이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즉 기독교가 어떻게 세속문화와 관계 하느냐의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종합의 길이란 문화신학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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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성서적 메시지의 존재론적 변형
이러한 틸리히의 매개신학의 착상은 현대의 세속화 과정 속에서 전통적 종교언어가 그 전달능력을 상실한 현대의 상황 속에서 종교의 실체적인 능력과 재생을 다시 현대인들에게 환기시키고 각성시켰다는 점에 있어서 크나큰 공헌 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틸리히의 매개신학 착상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추구한 바 신인동형주의 사상과 결별 하지 않고 오히려 실존론적 역동적 사고 속에서 새롭게 추구하고 있다. 틸리히가 진정으로 매개신학을 추구했다면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고전 독일관념론과 엄격한 결별을시도하고 변증법적 신학이 제시한 신과 인간 사이의 무한 한 질적 차이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이 기독교적 매개신학을 정립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틸리히는 절대자, 영원자가 유한자, 제약된 것 속에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으나 유한자와 영원자의 질적 구분을 명료히 하지 않고 유한자와 영원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유한자와 영원자, 세계와 신 사이의 진정한 매개의 길은 존재론적으로 변형된 새 존재의 힘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2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틸리히는 현 대인의 세속주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정서적 메시지를 해석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매개신학의 결과는 기독교적 신학 이 아니라 존재의 신학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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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사고-카이로스
1. 카이로스 개념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신적, 종교적 상황을 반성하면서 틸리히는 카이로스(Kairos)개념을 도입한다. 카이로스는 틸리히에 있어서 개신교적 역사 사고의 특징을나타낸다. 1 틸리히는 희랍 언어 사용에 상응하면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를 구분한다. 크로노스는 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의해 지배되고 측정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인데 반해서, 카이로스는 일회적이고, 숙명에 의해 정해진 역사의 순간이다. 틸리히는 이 희랍적 시간 개념을 예언적이고 기독교적 내용으로 다룬다. 카이로스는 충족 된시간 즉, 영원한 것이 시간적인 것 속으로 돌입하여, 그것을 동요시키고 전환시키어 영원한 것을 수용하도록 하는 순간이다. 이 카이로스는 위기와 창조가 동시적으로 야기한다. 위기란 악마적으로 된 옛 현실구조가 공격받고 훼파되면서 야기하며, 창조란 구속의 새 현실구조가 준비되고 생기면서 야기된다. 모든 카이로스의 원상(Urbild)이 란 기독교신앙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출현이다. 이 카이로스는 시작부터 중앙에 이르는 전 역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부여 원리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직관될 수 있는 역사의 중심이다.
이 획일적이고 특수하고 보편적인 카이로스 속에서 야기된 것은 파생적인 현실에 있어서 역사의 각 전기점 속에 서 상대적인 의미의 중심들을 만들어내면서 반복된다. 틸리히는 따라서 카이로스 개념을 확장해서 카이로이(Kairoi)라는 복수에 있어서도 사용한다. 구약의 예언자, 신약의 사도들, 카이로스 체험을 한 예수, 프란시스코 종단의 극단파, 르네상스의 시발자, 종교개혁자, 19세기의 시민혁명 및 사회혁명의 지도자들은 이 카이로이를 체험한 자들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은 그리스도 사건이다. 1933년틸리히는 카이로스 개념이 그의 정치적 확신에
- 반해서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zialismus)를 위해서 오용되었던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틸리히는 카이로이와 카이로스를 더욱 예리하게 구분하기에 이른다.역사 중심인 그리스도 안에서 수직적인 차원으로부터 새 것이 침입한다. 이 유일한 카이로스는 역사 속에서 카이로이, 파생된 카이로스를 가능케 한다. 이 카이로이는 신적인 것을 향해 열리고 무제약적인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신율적 시기(theonomes Zeitalter)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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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카이로스의 체험
틸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시기를(파생된) 카이로스로 체험했다.2 틸리히와 그의 동료들은 종교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종교사회주의(Religio ser Sozialismus)는 신율성의 시각, 곧 카이로스로부터 사회주의의 해석 지도 및 형성 시도로 이해되었다. 틸리히는 정치적 사회주의보다 더 극단적이고 혁명적으로 무제약적인 것으로 부터 위기가 보여지고, 카이로스가 의식화되는 깊이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관계들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자 했다. 틸리히는 종교사회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신율적 시대를 소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시민적 관념적 문화와 문화 기독교주의의 붕괴는 신율적 시대에의 여명에 대한 희망을 부여했다. 이 희망은 종교사회주의가 실현시킬 수 있다는 카이로스를 틸리히와 그의 동료들은 체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체험은 빗나갔다. 정치영역에서는 국가사회주의가 지배하게 되었고 종교영역에서는 변증법적 신학 형식을 지닌 신정통주의(Neo orthodoxie)가 형성되었다. 이 빗나간 체험에 대해서 틸리히는 역설적으로 대답한다. 우리는 틀렸고, 틀리지않았다. 카이로스에 대한 소식은 항상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념적 관념에서는 결코 현실이 되지 않고 실재적 관점에서는 긴 시공간 속에서 충족되는 것을 직접적인 근접(近接)속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소식은 오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선포하는 자는 이미 카이로스에 의해서 붙잡혀 있고 카이로스는 이미 현대적이기 때문이다.3 틸리히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1차 세계대전에서와 같은 황홀경적인 체험(ekstatisches Erlebnis)이 아닌 종말의 체험(Erfahrung des Endes) 을 느꼈다고 피력한다.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율적 해석은 그래서 낭만주의 의 가벼운 비행을 했다. 이것은 끝났다. 왜냐하면 종말 자체가 번개치는 것처럼 우리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새로운 시작에의 정조(情調)가 우세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종말의 정조가 지배하고 있다.
틸리히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간실존의 전 영역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텅빔의 경험(Erfahrung der Leere) , 무제약성과 최종성의 결여을 직관한다. 그는 종말과 텅빔경험의 근거를 깊이 차원의 상실 속에서 본다. 이 깊이 차원의 상실이란 삶의 의미,목적과 가치에 대한 질문의 상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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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리히는 텅빔의 경험과 더불어 새로운 카이로스를 예견한다. 카이로스의 가능성이란 종말 과 텅빔의 인정 에 있다.
우리가 삶의 결정적 차원, 깊이 차원을 상실했고 그것을 쉽사리 다시 발견할 수 없다는 통찰은 그것을 향한 전기(eine Wendung)일 수 있다. 누구든지 그가 그의 삶의 의미 근거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자는 이 이해를 통해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것과 연합되어 있다. 틸리히는 의미 근거를 상실한 우리 상황에 대한 극단 한 인식은 의미차원 발견의 전기가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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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종교의 존재론적 이해
종교의 재생이 깊이의 상실된 차원의 추구로 우리를 몰아간다면 종교의 재생은 창조적인 힘으로 역사할 수 있다. 틸리히는 여기서 종교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종교는 존재의 근거가 출현함이며 깊이의 차원이 역사하는 것이다. 깊이차원의 상실이란 깊이차원의 새로운 도래를 예고해준다. 모든 종교적 대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 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의 사라짐 속에서도 깊이의 힘 (die Kraft der Tiefe)은 작용하고 있으며, 그 상실이 가장 깊이 느껴지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8 틸리히는 종교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종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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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로는 선을 받는 열려진 손이고,
- 둘째로는 선물을 나누어주는 향하는 손이다.9 열려진 손 (einegeoffnete Hand)으로서 종교는 빈손을 가지고 신을 기다려야 한다. 틸리히는 현대인이 신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신에 관한 상(像)을 만들고 있다고 피력한다. 그리하여 현대인, 특히 기독교인들도 신을 기다리지 않고 신을 교리 체계 속에 가두고 교회 행정가는 신을 기구 속에 가두고 있으며 신자들까지도 신을 그들의 고유한 경험 속에 가두고 있는 사실을 지적한다.
신을 소유하지 아니한다는 것, 신을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신을 소유하거나 신을 지배할 수 있다는 주장 없이 매주일 설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이들, 이방인, 회의가들, 무신론자들에게 신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우리들 자신이 신을 소유하지 않고, 우리들도 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동시에 명료히 하는 것은 쉽지 않다.10 틸 리히의 전신학적(全神學的)사상은 신을 소유하지 않고 신을 기다린다 에 집중하고 있다. 틸리히는 신학자가 짓 는 성당은 결단코 완성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신이 선포되고 경배되는 성당이기 위해서 성당은 완성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복음만이 영원하고 신학은 시간적이다. 신학은 그러므로 영원한 복음을 항상 새로이 변천하는 시간 안으 로 번역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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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신비주의적 존재신(存在神)사상-성서적 카이로스 개념의 정신사화(精神史化)
틸리히는 깊이 차원을 상실한 현대 인을 향하여 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을 일깨우며 제1차, 2차 세계대전 후의 역사적 상황을 신을 기다려야 하는 카이로스로서 해석함으로써 카이로스 사상은 시대적 상황의 의미 질문을 상실한 현대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것 , 무제약적인 것 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도록 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틸리히가 현 대인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복음과 신, 종교가 과연 성서적 증언에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신을 소유하지 않고 신을 기다린다는 틸리히의 사상은 초기 바르트와 불트만의 변증법적 신학에서처럼 가시적 세계 속에서의 신의 부재성(不在性)을 말하고 있다. 가시적 세계 속에서 부재하고 있는 신은 신의 일식을 보여 주고 있다. 신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성전 속에 거하지 않는다 라는 틸리히 사상은 후기 하이데거의 신개념처럼, 신의 비대상화 내지 비객관화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11 틸리히는 신의 신성과 거룩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 머지 성서의 말씀과 선포 속에서 대상화되고 객관화되는 신의 술어적 계시 측면을 도외시하고 있다. 틸리히는 그럼 에도 불구하고 무제약자의 제약자 속의 현재를 주장함으로써 신계시의 신비주의적 현현을 피력하고 있다. 신을 소유하지 않고 신을 기다린다 는 틸리히의 사상은 성서적 관점에서는 인간종교적 체험으로 우리가 신을 지배하지 않고, 신의 은총을 겸손히 기다린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틸리히의 계시개념 이 말씀을 통한 인격주의적 자기드러남을 거부하고, 신비주의적 신의 초월적 현재를 말하기 때문에, 틸리히의 신기 다림의 사상은 성서적 인격신 개념을 떠나 신비주의적 철학적 신사상으로 변모되고 있다.
틸리히는 1961년 여름 학기 함부르크 대학의 초빙교수 시절 신의 부재(AbwesenheitGottes) 에 관해서 설교했다. 우리는 신이 우리에 대해 부재하는 신인 시대속에 살고 있다 신부재의 근거는 신 자체에 있다. 신이 우 리 시야로부터 떠나고, 개별 사람 뿐만 아니라 전(全)시대로부터 떠나 있는 것은 신적 영 자체의 역사이다 신의 영이 신을 우리의 시야로부터 신을 숨긴다 , 우리가 신을 부재한 자로서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를 안다 (wissen).12 이처럼 우리의 시대에 부재하고 있는 신은 가시적 세계와 역사를 향해 일식 상태에 있는 철학적 존재신(存在神)이지, 그의 영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성서적 신은 아니다. 틸리히는 신부재 경험을 통해 현대인은 신에 관해 안다(wissen)고 말한다.
지성적으로 알려지는 신은 종교경험의 황홀경 속에서 신비적으로 현현되는 존재신이지 인격적으로 계시되는 성서적 신은 아니다. 틸리히의 카이로스 개념은 그리스도 사진을 표준적으로 제시했다. 그의 그리스도 상은 그러나 반드시 역사적 예수에 연관되어 있는 자가 아니라, 새 존재의 감지자로서 부처나 마호멧이나 공자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성서적 카이로스 개념을 일반 종교적 내지 정신사적 카이로스개념 속에 일반화시키면서, 성서적인 일회적인 유일무 이한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 역사속의 카이로스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시간을 말한다. 이 카이로스는 일반정신사(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후)속에서 반복되지 않고, 그리스도 사건이 선포되는 곳에서 만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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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註) -
1. Carl Heinz Ratschow, Paul Tillich (1886 1965), in:M. Greschat(Hrsg.) Theologen des Protestantismus im 19. Und 20. Jahrhundert II 1978. 303-4 2. Paul Tillich, Gesamelte Werke(이하 GW)I, 101, Stuttgart 1959H. 3. Paul Tillich, GW XIII, 26 4. Paul Tillich, GW VII, 247 262 5. Martin Ka hler, Wissenschaft der Christlichen Lehre 1883. 6. P. Tillich GW XIII 34 63, C. H. Ratschow, 상게서, 310 7. Tillich Archiv V 1312a 8. P. Tillich, eine Handschrift Systematische Theologie, 72 Thesen 24. 9.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제1차 세계대전때 심연체험을 피력하고 있다. 4년 간의 전쟁체험은 나와 나의 전 세대를 향해서 다시는 잠글 수 없는 심연을 파내었다. 틸리히는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죽어가는 자들 사이에 헤매고 마침내 기진해서 죽은 자들 사이에서 잠들었던 베르둔(Verdun)전야를 기억한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나의 사고의 관념주의적 측면의 종말이다. 이 시간 나는 관념론이 붕괴되는 것을 감지했다. (P, Tillich, Auf der Grenze 1936 in: Auf der Grenze P.39) 10. P. Tillich, GWXII, 34 11. Fernand Chapey, Paul Tillich in. H Vo
- rgrimler und R. Vander Gucht Bilanz der Theologie im 20.
Jahrhundert, Herder, 1970. 44. 12. P. Tillich, Auf der Grenze, 13. 13. P. Tillich, Philosophie und Theologie, 1941:in:Der Protestantismus, P. 124=GWV, 110. 14. P. Tillich, Biblische Religion und die Frage nach den Sein, GWV, 154 15. H. Zahrnt, Die Sache mit Gott.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20. Jahrhundert, Mu nchen 1972, 5 1982. P. 338.
- 1. P. Tillich, Das protestantische Zeitalter 1948 in: Der Protestantismus. Prinzip und Wirklichkeit, Stuttgart 1950, 17f.
2. H. Zahrnt, 상게서, 329 3. P. Tillich, Philosophie und Schicksal , 1929 in:Der Protestantismus P. 46f=GWIV 34f. 4. P. Tillich, Gla ubiger Realismus , 1929 in:Der Protestantismus, P. 121=GWTV, P. 104f 5. P. Tillich, Die Protestantische Verku ndigung und der Mensch der Gegenwart , 1929, in:Der Protestantismus P. 241ft., 251f.=GW VII. P. 70ft., 80f Das NeueSein, Religi ose Reden II, Stuttgart, 1959, 116f. 6. W. W. Bartley, Flucht ins Engagement, Mu nchen 1962. P. 82. 7. P. Tillich, Kritisches und positives Paradox, Eine Auseinandersetzung mit K. Barth U. F. Gogarten , 1923=GW VII. P. 241. 8. P. Tillich, Systematische Theologie II, 머리말. 9. 박종천, 맑스주의와 틸리히의 신학사상 in:맑스주의와 기독교사상 1988. PP. 27 28 10. P. Tillich, Das Protestantische Zeitalter , 상게서 P. 13
- 11. 상게서. P. 14
12. 상게서. P. 29 13. N. Tamaru, Motive und Struktur der Theologie P. Tillichs, in:Neue Zeitschr. F. syst. Theol. 3. Bd.(1961), P. 3
- 1. P. Tillich, Kairos I, 1922;in:Der Protestantismus, P. 67ff=GWVI P. 9ff. KairosII, 1926, GWVI. P. 30ff, Kairos III, 1958, GWVI P. 137ff Ethink in einer sich wandelnden Welt in:Der Protestantismus, P. 196ff.; In der Tiefe ist Wahrheit, Religio se Reden I. P 41ff. Das Ewige im Jetzt, Roligio se Reden III. P. 119ff
2. P. Tillich, Das protestantische Zeitalter , in:Der Protestantismus, P. 17ff=GW VII, P. 16ff.; Kairos und Utopie, GWVI, P. 149f.; Religion und Profane Kultur , in:Der Protestantismus. P. 91f. 3. H.Zahrnt, Die Sache mit Gott, P. 394 4. P. Tillich, Religion und Profane kultur , in:Der Protestantismus P.96f. 5. P. Tillich, Die verlorene Dimension in:Die verlorene Dimension, Not und Hoffnung unserer Zeit. Ein Stundenbuch. Hamburg 1962. P. 8. 김영한, 현대인의 종교적 추구 in: 기독교신앙개설, 형설출판사 41988. PP. 38 43. 6. P. Tillich, Die Verlorene Dimension 상게서 P. 18 7. 상게서,19 8. 상동 9. P. T
- illich, Die Botschaft der Religion (1942), in:Der Protestantismus, P. 237.
10. P. Tillich, In der Tiefe ist Wahrheit, Religio se Reden I. P. 165f. 11.김영한, 후기 하이데거와 해석학 in: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박영사 2 1988. PP. 76 80 12. P. Tillich, Die Gegenwa rtigkeit des go ttlichen Geistes . In: Auf der Grenze, P. 75ff Das Ewigs im Jetzt, Religio se Reden III. P. 87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