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틸리히의 "중재의 신학"
- 신학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전승된 진리와 그 시대를 중재해야 하기 때문에 "중재의 신학"이었다. 특히 틸리히는 이를 위하여 "상관 관계의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현대 세계의 세속화를 받아들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그는 자율성을 가진 인간에게 그의 존재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제시하고 현대문화의 잘못된 방향 곧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방향을 시정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영원한 메시지를 그 시대에 대하여 해석하고 그 시대에 대한 메시지의 타당성 내지 의미를 제시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참 신학은 "답변하는 신학", "변증적 신학"이다. 변증적 신학은 "질문과 답변, 상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상호 관계시킨다." 상황 속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는 궁극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 문제, 제약된 문제가 아니라 무제약의 문제 곧 절대적 문제이다. 즉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문제"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문제에 답변한다. "하느님의 답변의 인상(Eindruck) 속에서 인간은 그의 문제를 제기한다."
- 존재로서의 하느님
- 틸리히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유한성의 범주들 특히 공간과 실체의 범주들에게 예속되어 있는 "존재"(Sein), 그러나 존재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 "존재 자체"(Sein- Selbst), 현실의 궁극적 근거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의 심연으로서 "존재의 근거"(Grund), "존재 구조의 근거"이다. 또한 하느님은 "비존재(Nichtsein)와 대립되는 것"이다. 비존재는 단순히 존재의 결함을 뜻할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존재는 "비존재로 말미암은 위협에 대항하는 무한한 존재의 힘이요 무한한 용기의 근거이다."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에게는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가진다. "존재의 힘으로서의 하느님은 모든 존재자와 모든 존재자의 전체 곧 세계를 초월한다. ... 양자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 무한한 '비약'(Sprung)이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유한한 것은 존재 자체와 그의 무한성에 참여한다." "모든 사물은 단지 유한한 방법으로 존재의 힘에 참여하며 모든 존재는 그들의 창조적 근거를 통하여 무한히 초월된다." 그러나 틸리히는 하느님을 많은 존재자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따라서 인격적 하느님이란 하느님이 인간과 같은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격적인 것의 근거이며 자기 자신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 존재로서의 하느님과 유한한 존재자 : 모든 존재자들은 하느님에게 참여하고 있고 하느님은 그들의 존재의 힘으로서 그들 안에 내재한다. 이와 동시에 모든 존재자들은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하다. "피조물이란 신적인 삶의 창조적 근원에 뿌리박고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을 뜻하고, 창조는 피조물의 자기 실현에서 성취된다. 그러나 이 성취는 창조적 근원로으로부터의 분리를 통하여, 본질과 실존의 단절을 통하여 일어난다."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 안에 근거되어 있으면서, 그의 본질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존재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뜻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절대적 비존재로부터 나와 있으면서도 그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므로, 그것은 유한한 존재,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하느님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다.
- 존재론적 요소들의 긴장관계 안에 나타나는 불안 : "비존재를 통하여 제한된 존재가 곧 유한성이다. 비존재는 존재의 '아직 아님'(Noch nicht)으로서 그리고 '더 이상 아님'(Nicht nicht)으로서 나타난다. 그것ㅇ든 존재를 가진 것을 존재의 종식을 가지고 위협한다." 불안은 존재론적 요소들의 "존재론적 긴장관계"들의 파괴와 이로 말미암은 "존재론적 구조"의 파괴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난다.
- ①개체화-참여(Individualisation-Partizipation) : 모든 인간은 개체화로 말미암은 고독의 위협을 당하는 동시에 참여와 관계성으로 말미암은 개체성의 상실과 집단화의 위협을 당한다. "자기 관계성은 세계와 사귐이 그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고독의 위협을 초래한다. 그 반면에 세계 안에 존재함과 세계에의 참여는 완전한 집단화, 개체성과 주체성의 상실의 위협, 그리하여 자아가 그의 자기 관계성을 상실하고 포괄적인 전체의 단순한 한 부분으로 변형될 수 있는 위협을 초래한다."
- ②역동성-형식(Dynamik-Form) : "역동성은 존재가 그 속에서 실젤로 있을 수 있고 비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형식을 추구한다. 이와 동시에 역동성은 경직된 형식들 속에서 상실될 수 있으므로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생동력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궁극적 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는 동시에, 생동력과 의도성이 그 속에서 상실될 수 있는 카오스적 무형식의 위협에 대한 불안 속에 있다."
- ③자유-운명(Freiheit-Schicksal) : 인간은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위험 속에 있는 동시에, 자기의 운명을 포기함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구하려고 하는 위험 속에 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논쟁은 자유와 운명의 존재론적 긴장관계가 객관적으로 나타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 우연한 행위들이 일어나는 무대에 불과하지도 않지만 운명의 기계에 불과하지도 않다. 그는 "자유와 운명의 동일체"이다.
-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론적 긴장관계를 파괴하고 그를 비존재로 폐기시키려고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이로 말미암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 "유한성은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상실하고 이리하여 자신의 자아를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유한하다는 것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불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용기를 필요로 하고, 이 용기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하느님에 대한 물음이다. "하느님은 존재 안에 포괄되어 있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 유한성의 범주에 나타나는 불안과 하느님에 대한 질문
- 말의 형식인 동시에 존재의 형식인 범주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동시에 그들이 예속되어 있는 "비존재"를 나타낸다.
- ①시간 : 시간의 긍정적인 요소는 새로움을 향한 창조적 과정이고, 부정적인 요소는 "모든 시간적인 것의 허무성",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순간을 고정시킬 수 있는 불가능성"에 있다. 이난의 자아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요소는 불안으로 나타나고, 이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나고 비존재가 내면으로부터 경험된다. 불안을 모든 순간마다 잠재적으로 현존하며, 인간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며 영과 육을 형성하고 정신적 삶을 규정한다. 또한 인간은 존재 자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이 존재론적 용기로 인하여 그는 불안을 이기고 현실을 인정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어려운 까닭은, 인간은 아직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미래를 표상할 수 있는 동시에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외되어 있는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에 대하여 자신의 현재를 방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존재론적 용기의 국극적 근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 ②공간 : 모든 존재는 자기를 위하여 공간을 얻으며 공간을 유지하고자 한다. 공간을 얻고자 하는 모든 존재의 노력은 "존재론적 필연성"이요 "유한한 존재의 공간적 성격의 결과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자질이다." 유한성이란 아무런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은 모든 장소를 결국 상실하며 이리하여 그의 종재를 상실함을 뜻한다. 불안은 자기의 공간을 상실할 수 있으며 아무런 궁극적 공간도 갖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아무 특별한 공간도 갖지 않으며 아무런 궁극적인 공간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최후의 불확실성을 뜻한다. 유한하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현재를 인정하고 자기의 현재와 함께 공간을 긍정하는 용기를 얻는다. 모든 사물은 "존재론적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이 받아들임을 통하여 확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어떻게 한 존재가 공간의 일시적 상실이나 궁극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
- ③인과율 : 인과율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원천을 가리킬 수 있는 힘이다.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사물의 존재의 힘을 찾는 것"이고, 또한 어떤 사물이 사건도 존재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의 존재는 우연하므로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아무런 필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존재의 필연성의 결핍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얻는다. 인간은 이 용기를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의 인과율적 의존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다." 그러나 인과율의 고리와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가 이 의존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 의존성에 대립하는 필연성을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인정할 수 있는가 ?
- ④실체 : 실체는 생성 소멸하는 "현상의 흐름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 어느 정도 정적이고 자기 자신 안에 근거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 "과정 속에 서 있는 것" 곧 실체의 존재를 우리는 언제나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유한한 것 속에는 실체가 있으나 이 실체는 변화로 인하여 상실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의 비존재를 드러낸다. 변화될 수 있는 실재는 비존재에 대항하는 실체성과 존재의 힘과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 불안은 달리 말하여 "변화 속에 포괄되어 있는 비존재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인간은 용기를 가지고 개체적 실체와 존재의 보편적 실체를 없애고자 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받아들인다. // 이 범주들은 "모든 유한한 것 속에 있는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성을 나타낸다." 네 가지 범주들은 "비존재의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느님에 관한 문제는 이 용기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
- 존재론적 상관 관계 속에 있는 하느님과 인간
- "인간 실존의 상황은 소외의 상황이다."그는 자기의 본질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면서 또한 하느님에게 참여되어 있다.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고 인간은 존재하는 한 존재 자체와 관련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언제나 위협을 당한다. 비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은 실존의 기본정조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존재의 용기를 주는 "존재의 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것" 혹은 궁극적 관심이다. 존재의 힘이 인격화된 존재가 JX 안에 나타난 "새 존재"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인격적 삶 속에서 "존재의 힘"이 실현되어 있다.
- 틸리히의 문제점과 신학의 중재적 과제
-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존재론적 상관관계에서 보려고 한 틸리히는 자신이 살던 그 시대와 하느님의 메시지를 중재하고 이 메시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연관성 내지 타당성을 제시하고자 한 위대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 ①인간의 존재 자체는 곧 하느님에 관한 질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문제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 오심으로써 일어나지 않는가 ?
- ②하느님 곧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신학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의 중재적 신학의 한계는 하느님과 이 세계의 구체적인 문제를 연결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 ③유한성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틸리히의 분석도 추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안의 문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 ④유한한 존재의 자기초월은 그의 존재론적 특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느님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유한한 존재에게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할 뿐이다. 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을 찾고 이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게 하는 하느님의 기능에 대하여 틸리히는 침묵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관관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을 일으키게 하는 역동성의 근원이라기 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불안읅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JX는 인간 세계의 고난 속으로 오셨고 고난당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 하느님의 영원한 메시지와 시대 상황의 참된 중재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존재의 위협과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답변"에 있다기 보다는 불의와 대립과 갈등과 억압으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에 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
'신학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맑스의 종교이론 (0) | 2009.08.17 |
---|---|
[스크랩]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생애 (0) | 2009.08.17 |
[스크랩] 폴 틸리히의 종교이해 (0) | 2009.08.17 |
[스크랩]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학 (0) | 2009.08.17 |
[스크랩] 현대신학의 종말론 (0) | 2009.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