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장
3장을 공부하기 전에.
2장과 3장의 시간 차이는 약30년이 납니다.
3장부터는 시기적으로 27AD이후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예수님의 성장과정에 대하여는 언급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또한 자라면서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하여도 전혀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누가복음 2:41-52에 기록된 예수님의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제외하고서는................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경인 아닌 다른 복음서에서는 어린 예수님이 행한 많은 기적과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서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 ‘예수님의 잃어버린 시절’에서는 예수님의 아이 시절에 예수님이 행한 기적, 또 외국 특히 인도로의 여행 그리고 인도에서의 수행(?)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외국으로 여행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21장 25절입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즉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성경에서는 다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외국의 여행과 또 그곳에서의 하신 수행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요한복음 1:31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친척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계속 나사렛에서 보내었다고 한다면 이 세례요한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이런 것을 주장하고 있는 유명한 책 몇 권을 더 소개하고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조금씩 자세하게 소개할까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잃어버린 시절
( The lost years of Jesus : 엘리사벳 크레어 프로펫트)
2. 예수님의 비밀(The Jesus Mystery: 야넷 �)
3. 인도에서의 예수님의 삶(Jesus lived in India: 홀져 켈스턴)
이 책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믿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정말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공격이 아직 그리 심각한 지경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는 이것이 매우 심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반면에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 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이 예수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이교들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오랜 동안 연구하였고, 현재도 계속 공부하고 있는 신학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얼마 전에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한 권은 제목이 오강남이라는 사람이 쓴 ‘예수는 없다’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은 캐나다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기독교도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해야하고 또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이 있다는 심각한 기독교의 현안 문제를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책은 전 이화여대 교수이며 교목실장을 지내고 그리고 전국 기독교 학교 교목회장을 역임하고(?) 미국 이민 목회를 하시다(?) 은퇴하신 조찬선 목사가 쓴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입니다. 그가 그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종교의 다원주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4:12절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라는 베드로의 간증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베드로는 거의 문맹에 가까운 어부였고, 그가 알고 있던 세계는 단지 중동 일대와 로마뿐이었으므로, 아메리카인 또는 동양인들을 그가 전혀 몰랐으며, 또 인도나 중국의 종교를 연구 공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구원이 단지 예수에게만 있다고 알고 있었던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만을 지금은 여기에다 옮겼습니다만, 앞으로 조금씩 옮겨 정당하게 평가할까합니다.
요지는 지금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간까지도 이들이 흔들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정신 차려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믿는 신앙의 뿌리가 잘못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른 믿음에 필히 바르게 서야 할 때입니다.
마태복음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성경에는 모두 5명의 요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은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세례요한입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는 나중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나머지 요한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둘째 요한은 마태복음 4:21,22, 그리고 마가복음 1:19-20에 등장하는 요한입니다.
이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의 가버나움에서 어부로 살던 사람이었으나 베드로와 더불어 이 형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12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9절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중의 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요한이 요한 1, 2, 3서와 요한 계시록을 썼을 것이라고 하나, 요한이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썼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전승은 이 요한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이 사람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를 부탁한 요한 (요19:27)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요한은 늙어서 에베소서에 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젊어서 일찍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순교하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 요한은 요한 마가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바나바의 사촌이며
(골로새서 4: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이상하게 영어성경은 사촌으로 그리고 우리말 성경은 생질로 번역되어 있음), 바울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제 1차 전도여행 중간에 너무 힘이 들어 도망하였던 전력 때문에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당시에 바울과 바나바가 이 사람에 대한 의견이 달라 서로 다른 전도여행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사람이나 나중에는 바울의 둘도 없는 동역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디모데후서 45:11)
넷째 요한은 요한복음 1:42절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안드레와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입니다.
다섯째 요한은 사도행전 4:6절에 있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친척 요한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첫째 요한 즉 세례요한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은 4개의 복음서에 모두 비중 있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에 대하여는 누가복음 1장에 자세히 기술된 것과 같이 아론의 자손입니다. 아버지는 제사장인 사갸랴이며, 어머니 또한 아론의 자손이며 그 이름은 엘리사벳입니다. 태어난 시기는 4BC 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6개월 전이며, 어머니 엘리사벳과 연결되어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이 됩니다(누가복음 1:36).
세례 요한의 중요성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는 마지막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은 서로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이며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였고(누가복음7:28), 마가복음 9:13절에서는 제2의 엘리아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는 자(마가복음 1:2)이었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선포한 사람이었고, 죄의 고백을 받고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메시아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는 것을 듣고 세례는 베풀었으나 예수님과는 달리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고, 또 성령을 사람들에 나누어주지도 못하였습니다.
잠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누가복음과는 달리 왜 마태복음에서는 요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없이 세례요한이 바로 등장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쓰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요한이 누구인가를 자세히 누가복음과 같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요한이 누구의 아들이며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에 대하여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과 쿰란 공동체와의 관계.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과 쿰란 공동체와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잠깐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요한은 광야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80). 광야는 예루살렘-헤브론 도로와 사해사이에 위치한 메마른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 광야의 장소 중 한 곳이 쿰란이었습니다. 이곳은 요단강과 사해가 만나는 곳이며 요한이 그곳에 있었을 당시 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 사람들이 살았던 고장입니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다량의 사해문서가 발견된 후부터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쿰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쿰란과 사해문서(Dead Sea Scrolls)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사해 북서쪽 연안에 있는 동굴 군에서 발견된 고문서의 두루마리를 말하며 이를 쿰란의 주민(유대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파의 종단이라고 생각됨)이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쿰란문서라고도 합니다. 1947년에 7권의 양피지 두루마리가 동굴 안에서 발견된 것이 최초이고, 그 뒤의 조사에서도 동판 두루마리를 포함한 많은 문서가 출토되었는데, 주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수장․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들 두루마리는 원래 뚜껑이 달린 원통형 토기에 담겨져 있었고, 양피지나 파피루스의 경우는 잉크로 씌어졌고, 동판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언어는 헤브라이(히브리)어가 주이고, 아람어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연대는 BC2세기에서 BC40년에 걸쳐 있는데,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서의 최고 사본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쿰란교단의 계율/사상/성서해석을 기록한 두루마리도 있습니다.
사해문서가 발견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1947년 5월 염소를 돌보던 무하마드라는 소년이 염소 수를 헤아리다가 한 마리가 부족한 것을 알고 염소를 찾아 헤맸고 다니다, 바위틈에 뚫려 있는 동굴에서 고대의 항아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동굴은 길이 8.5m, 넓이 3m, 그리고 천장이 3m나 되는 꽤 큰 공간이었습니다. 동굴 안에는 높이가 60cm 정도의 큰항아리가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안에 44cm의 폭에 8m나 되는 기다란 두루마리가 엉켜있었다고 합니다. 소년은 이상한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힌 8개의 두루마리를 꺼내들고 동굴을 나섰는데, 구약성서의 원본인 쿰란의 사해문서가 발견된 순간이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검소한 금욕 생활. 즉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과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석청과 메뚜기를 먹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이 쿰란에 살던 사람들이 살았던 그 생활과도 어느 정도는 일치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쿰란의 정 결례와 세례 요한의 세례 연관성입니다.
쿰란과 세례 요한의 관계를 세례 중심으로 본다면 한층 더 깊은 관련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청중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회개할 것, 세례를 받을 것과 의로운 삶 즉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살아야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쿰란공동체가 살던 주거지에는 세례를 위한 저수지의 유적이 남아 있어 청결케 하는 의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적 정결을 유지했고 매일 몸을 씻음으로서 필요한 정결을 얻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의식에 있어서도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쿰란의 세례는 반복적이고 의식적이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는 일회적이라는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옷은 쿰란 사람들이 흰 린넨 천의 옷을 입은 반면에 요한은 낙타 털옷과 가죽 띠였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하여 요한은 이들과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3장 1 절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광야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desert(광야)라고 합니다만, 우리가 물어보아야 할 것은 왜 요한이 광야에서 즉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에서 전파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영어를 우리나라 말로 해석하는 데에 아주 힘든 단어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 preach 라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물론 사전적인 해석은 전파하다 전도하다 설교하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완전한 뜻이 통하는 번역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나라 말을 영어로 번역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누구에게 전도하였다고 할 때, 영어로 preach를 쓰거나 또는 introduce 즉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등으로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여튼 이상하게도 광야에서 전도합니다. 전파합니다. 설교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광야라는 곳은 관광객(?) 특이 광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외에는 일반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도시 예루살렘에서 설교하지 않고 황량한 광야에서 설교하고 있을 까요? 광야에서 그가 설교한 대상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구약에 있어서 광야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탈출한 후,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돌아 다녔던 곳은 광야에서였습니다. 또한 모세와 다윗을 비롯한 많은 위대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거의 얼마동안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다음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 보내어져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광야에 보내어져서 자랐습니다.
누가복음 3:2절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 요한에게 일어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during the high priesthood of Annas and Caiaphas, the word of God came to
John son of Zechariah in the desert.
여기에서 빈들은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즉 요한이 빈들 광야에 있을 때에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고 합니다.
말씀이 임한다는 말은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에 관한 자세한 것은 제가 5월2일자로 생명의 말씀 난에 올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라는 설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광야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힘을 얻고 담대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이 광야에서 설교하게 됩니다. 이 광야라는 곳은 아무 것도 살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 다윗, 또 요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참 이상한 현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에, 또한 그곳에는 정말 의지할 만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 광야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 친 결과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마태복음 3: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제가 자꾸 영어 성경을 사용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해는 제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구절에 대하여 자세히 보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 우리말 성경은 그 뜻이 모호할 때가 있어서 영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사용하려 합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면 천국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람들의 회개와 상관없이 우리들에게 가까이 옵니다.
다만 우리가 회개하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천국에 참여하기 위하여 입니다. 즉 우리가 회개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참여해야하는 그 천국이 이미 우리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회개하라, 왜냐하면 천국이 가까이 있느니라”라고 번역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가 회개하면 천국이 내 마음에 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내가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과거의 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그리고 나에게 가까이 온(?) 천국에 내가 자발적으로 합류하여 참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천국이 내 마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오면 내가 그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제발 이 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회개하다’는 뜻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어로 회개하는 말은 전통적으로 마음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영향으로 회개라는 말에는 행동의 변화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요구하는 회개에는 죄와 의에 대한 지금 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과 태도를 완전히 변화시킴으로 변화되기 전의 생각과 태도를 즉 이제가지 살아온 삶 자체를 변화시켜 새로운 삶으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렵게 되었나요?
다시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고 또한 행동조차도 바꾸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태도와 그것으로 생겨나는 새로운 행동을 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내적으로 변화를 의미하며 외모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나의 방법 즉 나의 길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한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는 사실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의 죄에 대하여 후회하고, 슬퍼하며, 그리고 미안함을 느끼는 정도를 회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금 더 잘(?) 회개하는 사람은 눈물도 펑펑 흘리며 잘못했다고 하나님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깊이 후회하는 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보다 훨씬 더한 무엇이 즉 마음도 태도도 행동도 가능하다면 외모까지도 변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억하시고 제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3: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여기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 둘째는 천국이란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상에 천국이 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천국이 왔습니까?
요한이 설파한 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을 영어로 the Kingdom of Heaven이고 합니다만
누가복음에서는 the Kingdom of God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둘 다 우리 나랏말로는 천국으로 번역합니다.
복음마다 그 표현이 다른 이유는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하여 저술하였고
누가복음은 이방인들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위하여 쓰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무서워하고 또 존경하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The Kingdom of God이라고 하여야
함에도 하나님이라는 말 GOD을 직접 부를 수가 없어서 이것을 Heaven으로 바꾸어
천국을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천국이라고 번역하는 것에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의 왕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바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어서, 이 땅에
정의를 세우고, 또 이스라엘 나라를 반대하는 나라를 제거하며, 새로운 왕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며 메시아가 자기들의 왕이 될 것이라는 그 메시아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 메시아는 다윗의 계통으로 오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참조로 다음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하 7:12-16, 예레미아 23:5-8, 31:31-34, 에스겔 37:24, 다니엘 2:44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의 속박에서 독립시켜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을 다시 세우고, 그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세계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수님 당시에도 이 메시아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어떤 통일된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달랐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하여도 사람들은 일관되게 일치된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가 와서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국가적인 독립과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 메시아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메시아 사상과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그 메시아 사상과는 의미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와서 건설할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왕국과 성경에서의 말하는 왕국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건설하시고자 한 왕국은 사실 어떤 지역적인 것이거나 또는 정치적인 왕국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적 지역에 대한 왕국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지역적으로 가능한 것이나 존재하는 것이 아닌 즉 영적인 왕국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거나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 즉 천국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이 왕국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 그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하여 현재에도 존재하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씀드리자만 성경에서 사용하는 왕국은 현대적의 개념인 지리적인 왕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전 영역, 영적이나 지리적인 영역을 함께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이 어디 있다 더라, 즉 울산에 있다 부천에 있다 또는 미국 어디에 있다 심지어는 남미 어느 정글에 있다는 것은 다 틀림없이 가짜일 확률이 많습니다.
제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법 안에 있는 한 내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즉 여러분이 계시는 바로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의미를 현명하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을 전체적으로 해석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천국이 이제 가까이 왔기 때문에 회개를 하여서,
즉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생각과 태도와 그런 생각과 태도로 행하여왔던 그 행동에서 완전히 돌이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태도로 다른 길 즉 옳고 바른 길인 하나님의 길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내가 들어가는 것임)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위의 말씀은 이사야 40:3절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모든 4개의 복음서는 이사야에서의 이 예언이 세례요한은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4:5절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아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기에서 보내실 엘리아가 세례요한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례요한은 외치며 준비하는 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람을 알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의 말씀과 마태복음 또는 다른 복음에서의 이 요한에 대한 이사야의 인용한 말을 비교해보면 약간 다름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였습니다만, 마태복음이나 다른 복음에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여서 하나님을 예수님으로 바꾸었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국가 원수가 어디를 방문할 때에는 미리 사람을 보내어 모든 것을 그곳 사람들과 함께 준비합니다. 경호상의 문제, 의전상의 문제 등등을 미리 다 완벽하게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에도 많은 사람이 방문할 나라에 미리 가서 완벽하게 준비하여 대통령이 갔을 때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이는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이 어떤 곳을 방문하기 전에 그 왕에 속한 사람들이 그 방문할 곳에 미리 가서 길을 다시 고치고 준비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3: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세례요한의 외모는 확실히 보통사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에 의하면 요한당시의 가난한 사람들도 역시 낙타 털 통옷을 입었고 이 옷을 여미기 위하여 가죽으로 만든 띠로 허리를 동이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식은 메뚜기와 꿀도 먹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들이 살았던 이유는 그것이 좋아서 또는 멋이 있어 그렇게 하였다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즉 그 옷밖에 입을 것이 없었고, 다른 재료로 허리띠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며, 먹을 수 있는 것도 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메뚜기와 꿀이 가난한 사람들이 입고 먹을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외적인 모습이나 먹는 그 생활습관이 사람들의 눈을 끈 것이 아니라 그가 광야에서 설파한 그 대담한 설교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입고 먹고 그리고 전하는 그 모습이 열왕기하 1:8절에서 기술하고 있는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열왕기하 1:8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They replied, "He was a man with a garment of hair and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The king said, "That was Elijah the Tishbite."
여기에 조금 이상한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엘리야는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고 영어 성경은 분명히 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는 털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말 성경에서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 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 교제로 사용하였던 성경이 당시의 영어 성경 KJV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경은 오랜 동안 서양교회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 구절은 분명히 그는 털옷을 입고 있는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라가 맞는 표현입니다.
당시 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는 이유는 그 당시 옷은 오늘날처럼 짐승의 털을 잘 처리하여 부드럽게 만든 원단으로 짜서 만든 옷이 아니라, 그냥 거칠게 처리한 것이기 때문에 옷이 많이 뻣뻣하였고 또 그것으로 통옷을 해 입으면 옷이 벌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옷은 상하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당시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웃옷과 아래옷이 붙은 오늘날의 통 원피스와 비슷한 모양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거칠게 처리한 털로 통 원피스를 만들어 입었다면 그 모양이 어떠했겠습니까?
몸에 완전히 붙는 옷이 아니라 붕 떠있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즉 옷이 몸에서 뜨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죽으로 띠를 만들어 허리에 띠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왜 이런 괴상한 옷을 입고 있을까요?
엘리야는 자기가 이 옷을 선택하여 입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사악한 왕들에 의하여 고용되어서 자만에 빠져 호화롭게 살고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목적과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 모습을 보며 슬퍼하는 의미로 이런 미천한 옷을 입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 후 이런 옷차림이 전통적인 예언자의 참모습인 것처럼 사람들이 인식하여 나중에는 거짓 선지자들도 이런 차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스가랴 13:1-4).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늘날 목자들의 모습은 어떠해야합니까?
목사님들의 생각과 행동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교회의 집사님이 목사님이 타고 다시는 차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에쿠스를 타는 것에 대하여, 목사님이 너무 좋은 차를 타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무엇을 입건 무엇을 먹건 또는 어떤 차를 타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목사님을 목사님답게 보이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지나치며 한마다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이상한 것은 이러한 세례요한의 이상한 옷차림과 또 요한의 그 독설이 이렇게 사방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7-9를 보시면 요한은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서 요한에게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정말 진지한 그 열정에 매료당하였고 또한 요한이 하는 말에 어떤 정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의 결과로 사람들은 요한에게 나아와서 공개적으로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자복하다는 말은 영어로 그냥 confess 고백하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그 뜻은 더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에크모로고우메노이(Exomologoumenoi)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합성어 즉 두 개의 단어가 합하여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인정하다, 받아드리다, 또 자백하다 는 단어와 공개적으로라는 단어가 합하여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읽으면 ‘자기들의 죄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하여 고백하고’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자기의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잘못을 받아드리는 사람들에게 회개한 증거로 세례를 베풀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요단강에서 베풀기 전에도 이스라엘에는 세례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있었던 세례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3가지 기본적인 것을 행하여야 하였는데, 그것은 할례, 목욕 그리고 희생제물을 받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 세례적인 목욕은 이전의 이방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죄를 깨끗이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그의 상징성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넜던 것을 기념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도 이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다음 3가지 의미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1. 이전 유대인이 베풀었던 세례는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으나 요한의 세례는 유대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이전 이방인의 세례는 본인 스스로가 수행할 수 있는 세례입니다만 이 요한의 세례는 꼭 다른 사람이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3.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v7절을 미리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4. 요한의 세례는 흐르는 요단강의 물에서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세례는 집에서 하는 정지된 물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단강은 상징적으로 생명의 강입니다(에스겔 47:9).
우리가 v6절에서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하였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한 죄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죄를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범한 잘못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네! 인정합니다. 정말 때로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는 것,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만, 우리는 그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요사이 검찰청에 소환되면서 하는 말이 있더군요. 검찰에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공개적으로 자기들이 잘못한 것에 대하여 인정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회개의 첫 단계는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정말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하시고자 한 사람은 죄인임을 자백하는 죄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잠언 28:13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리고 시편 32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5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마태복음 3:6-7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특히 v6절에서 잠깐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고 그리고 v7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음으로서 죄를 용서받아 세례 받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세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의식이 아닙니다.
세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례는 마치 구약에 있어서 제사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의식으로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6:16절에 보면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마치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오해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학자들이 이 문구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잠깐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해하시기가 어렵더라도 그냥 흘려들으시며 아^^ 그런 것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넘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원본은 하나일 것입니다만 성경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동안 성경을 여러 번에 걸쳐서 손으로 필사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급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종류의 복사된 성경이 세상에는 넓게 퍼져 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 종류만도 5360개의 사본이 있고, 라틴어 성경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많은 종류의 성경들의 글자들이 정확하게 서 일치하지 않고 있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이 많은 성경을 다 대조하여 어떤 성경이 맨 처음 쓴 성경의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인 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부르는데,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 마가복음 16:16절은 이 구절이 원래의 성경 구절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있어 아직도 모두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들은 믿고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지 믿음이 없이 세례만을 받음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경이 사람의 손에 의한 필사로 쓰인 성경이 전하여 지는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여 사실 어떤 구절은 약간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어떤 신학적인 심각한 오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단지 몇몇 글자의 차이로 인하여 해석의 가능성이 조금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다시 말하면 세례는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마음을 갖겠다는 하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세례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을 외부적으로 표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이 더 어렵게 되었습니까?
v7절에서 우리가 조금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두 지도층이 등장합니다.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문제는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바리세인과 사두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 시대의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그리고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있었던 그리고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그 시대의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법정 기관 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요인들로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유대교의 종파에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엣세네스인 열심당원 그리고 사마리아인 등 많은 유대교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요한이 여기에서 지독한 욕을 하고 있는 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지도층이었던 사람들이었던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요한에게 왔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들이 요한에게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당시 이들이 속해 있었던 이스라엘의 최고 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대표자들로 요한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파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뜻은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또 세례를 받기를 원하였기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요한의 말투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말이 부드러우며 무엇을 사람들에게 권유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친절한 말은 절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환영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요한의 설교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이들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 이렇게 하면 혹은 저렇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이러한 거친 말투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방에서 이곳에 모여듭니다.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렇게 요한처럼 대담한 말투를 흉내 낸 그러한 말투로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면, 과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이며 또한 사람들은 과연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 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설교는 정말 우리로 하여금 참 많이 생각하게 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설교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설교가 어떤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하여 하고 있는 설교는 분명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사람이 ‘독사의 자식아’라고 하는데 좋아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설교는 너무 믿음만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기독교의 구원이 사람들에게 너무 쉬운 인상을 심어주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v8절에서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그 동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7절의 하반 절과 그리고 8-10절입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 지우리라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요한은 어떤 이유에서 이들에게 이러한 정말 강력한 비난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보다 즉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말과 임박한 진노를 받을 사람이라는 말보다 더욱 지독한 말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한 마디로 망할 놈(? 죄송합니다)이라고 하는 말 아닙니까?
그 이유는 나중에 예수님이 이들을 향하여 비난하셨던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v7절에서는 이들을 비난하고 그리고 v8절에서는 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v9절에서는(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은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이 있었음)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이 요한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속으로 비난하고 있음을(네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요한은 알고 있으며, 이들이 마음속으로 정말 회개하여야 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v10절에서는 요한은 이들에게 정말 지독한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이들의 교활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뱀처럼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따른다고(v7) 요한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면 이들이 이 비난받는 이유가 자세히 나옴으로 여기에서는 이쯤 언급하고 중단하겠습니다)
v8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Produce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우리말 성경에는 ‘맺고’라고 하여서 다음 문장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서는 완전한 명령문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 중에서 가장 핵심 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여기에서는 분명히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함으로서 선한 행위에 의한 의롭다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행위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구원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야고보서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4-2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모든 것이 다 헛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을 한 루터는 이렇게 구원에 대한 야고보의 이론과 바울의 이론이 서로 달라서 야고보서를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이론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실한 믿음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한 회개를 하게 합니다. 진실한 회개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태도를 또 예전에 가지고 있던 그것에서 완전히 변화시켜 새로운 생각을 하게하고, 또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태도를 갖게 하며, 그 사람의 행위까지도 옛날의 그 행위에서 변화시켜 새로운 행동을 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변화되지 않은 회개는 회개하지 않을 것과 같습니다.
위선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에 있는 것과 실제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다를 때 이를 위선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악하나 행위는 선하게 하는 것 이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는 남에게 그렇게 보이게는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마음이 악한대로 그 사람의 행위도 다시 악해집니다.
끝까지 속일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 마음속에 없는데 사랑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도 위선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미워하는 바리세인들이 이런 위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위가 어떠하던 그 사람의 사랑은 정말 진실한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마음에 사랑이 있습니까?
요한이 v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심으로 회개한다함은 마음이 우선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그리고 태도가 바뀜으로 인하여 이러한 바뀐 마음, 바뀐 생각 그리고 바뀐 태도로 그 사람의 삶의 행위와 모습 속에서 그 회개한 것이 나타나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하면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우리의 마음은 변화하지 않으며, 선한 일을 하는 열매는 더욱 더 맺혀 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그 열매가 맺어집니까?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내가 맺는 열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성령의 열매라고 하심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즉 여기에서의 이 성령의 열매는 내가 노력하여 맺어 지는 것이 아니며, 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서 오셔서 역사하여야만 얻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열매가 우리의 목적 즉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열매만을 맺는 것이 내가 이루어야 할 끝이 아니라, 열매를 맺은 후에는 이 열매로 무엇을 반드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역사로 사랑이라는 열매가 내 안에 맺었다면, 그 사랑의 열매로 내가 남을 사랑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그 열매를 맺는 목적입니다.
다른 열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마음으로만 믿습니까? 그렇다면 아직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믿음으로 만의 구원의 범위는 야고보서에 말하는 행위로 나타나는 구원의 범위보다 약간 더 넓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아직은 성숙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여 예수님을 정말 믿어지기는 하지만 아직 행위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보여주어야 할 행위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았음을 저는 전혀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여야 할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의 행동이 믿는 자의 행동이 아닐 때는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며 아마도 그의 믿음은 가짜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반드시 어떤 사람의 행위가 선하다고 하여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도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9-10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 지우리라
v8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자부심. 즉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며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합법적인 백성이라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 전통을 정면 부인하는 말입니다.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고 많은 조상들이 침략자의 나라에 끌려가기도 하고, 또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어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모국어조차도 잊어버리고 산다고 할지라도, 또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이 절망하지 않고, 항상 희망을 가지고 이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한 그 힘은 바로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의 합법적인 백성이 너희들 만이라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며 이 세상의 어느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사실 마태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첫째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이며, 둘째 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v7절의 ‘임박한 진노’와 v10절의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 지우리라’라는 말은 요한의 부르짖음대로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임박한(시간적으로는 아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v12절에 나오는 불과 v10절에서 나오는 불은 모두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한 이 경고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제가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말 우리가 평가하기에 진짜 예수님을 믿는 구원받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 기독교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되고, 또한 커서는 교회에서 집사, 장로로서 자기의 의무를 다 하며, 행위는 정말 하나도 남에게 거슬리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정말 그리스도인일까요?
변함없는 믿음에 근거한 변화된 삶의 확실한 증거 없이,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거나, 또는 선한 일을 하였다하여 정말 그 사람이 구원받은 성도이라는 것에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A good fruitless christian is no christian at all.
좋은 열매가 없는 기독교인은 정말 기독교인이 아니다.
제발 이 말을 기억하시고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3:10절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8-9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결론입니다.
즉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 심판하겠다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요한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나무와 같습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열매를 분명히 맺어야 하나, 반드시 그 열매는 좋은 열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나쁜 열매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불에 던져버려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7: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3:11-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이 물론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요한의 설교의 요점은 모두 예수 중심적인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요한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달라질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면에 있어서 달라집니다. 세례의 방법도 다릅니다.
요한은 세례를 물로 주었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성령과 불로 줄 것입니다.
또한 요한보다도 예수님은 더 많은 능력을 소유하시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요한은 v11-12절에서 이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이 예수님이 자신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잠깐 생각할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달라지는 것 중에서 특히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구원은 율법에 의한 구원이었으며, 이것에 의한 구원은 무엇을 지켜야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와 같이 율법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무엇을 하라 적극적인 명령이 248가지가 있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365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명령은 모두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명령입니다. 안 지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키지 않으면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이 율법주의를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즉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만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율법은 지켜야만 합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은 때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틀림없이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기를 강요하고 또 무엇인가를 하지 말기를 강요합니다.
율법은 사랑하기를 강요합니다. 또한 율법은 선한 삶을 살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은 그러한 즉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가 남을 사랑하게 하는 그 마음을 주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며 또 무엇을 하지 말라고 명령 합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남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남을 사랑하지 않아서 잘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아니한 죄의식을 가지게는 할 수 는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고 또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만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율법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결코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변하여 무엇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잠깐 이 성령에 대하여 조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무엇입니까?
시편 51 편 11-12에서 한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Do not cast me from your presence or take your Holy Spirit from me.
Restore to me the joy of your salvation and grant me a willing spirit, to sustain me.
여기에서 성신은 성령의 옛날 번역된 우리가 성령을 부르는 이름이며, 또한 자원하는 심령은 영어로 a willing spirit로 표현하여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오셔야 우리 안에 자원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즉 Holly Spirit이 우리 안에 오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습관적인 죄를 반복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또한 무엇을 하라는 명령, 즉 사랑해라 용서해라와 같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명령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것을 지킬 마음도 생겨나지도 않고 또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하면 몇 번은 가능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 22-25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사랑 희락 화평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열매는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열매가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자원하는 심령)이 와서 그 성령이 역사하여 맺은 열매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내 스스로 아니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런 생각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어떤 일을 하기에는 지금 조금 모자라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조금 나에게 주시면 그것을 받아서 다음부터는 어떤 도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무엇이던지 내가 내 능력대로 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은 아주 심각합니다.
심지어는 기도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받기 위하여 하여야하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참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조차도 미안하지만 내가 결심하면 예수님을 믿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 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즉 믿음조차도 그냥 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은사로 주시어야 생겨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내가 노력하여서는 예수님을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하여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조차도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허락하시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는 특권을 누리며, 구원을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발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고 구세주로 받아드린 우리는 이미 충분히 축복 받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축복을 누리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껏 자랑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으려다 못 믿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성령세례에 대하여 잠깐 더 생각해 볼까합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언급하는 성경을 조금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8b -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누가복음 3:16b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요한복음 1:33b -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사도행전 1:5b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읽어보면 이 요한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이것에 대하여 한마디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이런 것입니다.
사도행전 2:4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8,31, 9:17, 13:9)
즉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면 예를 들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힘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일으키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믿는 자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그의 삶의 모습이 예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 마음에 이미 성령의 역사로 모든 것이 다 깨끗하게 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로마서 6장부터 8장에서 이야기하는 성화 과정이 순간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조금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기억하여야 할 것은 성령 세례 없이는 결코 성령충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세례와 불 세례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은 같은(? 정확한 뜻을 표현하기가 무척 힘이 드네요. 제가 표현력이 없어서요)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3:11b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그리스어 원문을 제일 정확하게 해석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령 세례를 받으면 불 세례를 함께 받은 것이 되며 불 세례를 받으면 성령세례를 함께 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둘을 불리하여 생각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이때 불 세례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는 의미로 과거의 모든 죄를 불살랐다는 심판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12절에서 이야기하는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는 것은 위에서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그 불이 믿는 자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모두 태워버리는 역할을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 즉 형벌을 의미하여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3:13-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태복음 3:13-17을 보시면 두 인물이 서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사역은 이곳을 기점으로 즉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것으로 최 절정을 맞이하여,
그 후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새로이 예수님이 등장하여 그의 사역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고 있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점점 약해지고 예수님의 역할은 점점 흥해집니다.
마치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 3:30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어린아이로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는 것으로 마감하였으나 다시 이곳에서는 완전히 성인이 되어서 유대의 남쪽에 위치한 요단강에 오시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자기의 죄를 회개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를 예수님이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죄와는 무관한 분이십니다.
그 증거는 11절에서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요한이 말하였고 여기에서도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15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의 그 논리에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고 조금 애매한 대답을 하시며 또 다른 이유로 세례를 받으려 하시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려는 의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의를 이룬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형식적이고 도덕적인 것까지도 모두 이루어 하나님이 명령한 어떤 것 하나도 다 지켜져서 율법이 완성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설명이 어려워졌습니다.)
좀더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작은 것 하나라도 모두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한이 행한 모든 사역이 정당함을 보증하시려 하시는 이유입니다. 즉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보증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그 사람이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헛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선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일이 행하여지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정말 생각하고 기도하여야 할 것은 과연 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많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영어로 옮긴 말씀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본 것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동시에 보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의 소리도 누가 들었는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말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매우 기뻐하는 자이니라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1:10-11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서는 분명히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심을 보고 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라고 하여서 예수님이 보고 들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이 보고들은 것에 대하여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3: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 보고 누가 들었는지에 대하여는 여기에서도 명확하게 말씀하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못보고 못 듣고 단지 예수님만이 보고 들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31-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리고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은 다른 복음에서도 모두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복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3:14-15입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것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이때까지 기다렸던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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