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마태복음 4장

춘천 김상호 2007. 10. 17. 22:24

마태복음 4장

마태복음 3장에서 두 가지만 더 생각하고 4장으로 넘어갈까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의 의미입니다.

물론 세례를 받는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요한에게 말하였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예수님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이시라는 것과 또 그 메시아가 메시아의 사역을 세례를 받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신다는 선포입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잉태에 대하여는 어머니인 마리아 그리고 아버지인 요셉  정도만이 알고 있었으며, 태여 나실 때에 목격한 사람들도 목동 몇 사람 그리고 동방 박사들 정도입니다.

요한조차도 예수님과 친척임에도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요한에게 나아와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의 머리 위에 임하심을 보고 또 하늘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공포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에서 온 소리의 의미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랍비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가 죽은 후에는 성령이 이스라엘을 떠났음으로 더 이상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놀랐던 내용은 그 소리의 내용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대하여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역을 이 땅에서 시작하실 모든 조건(?)을 구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입니다.

4장은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마귀에 의해 시험을 당하십니다(v1-11)

2.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가셔서 정착하십니다(v12-17)

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v18-22)

4.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v23-25)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왜 하나님의 일을 바로 시작하시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시작하시느냐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무려 30살이 되어서야 하시며, 또한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리고도 모자라 왜 성령의 인도함으로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어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도 모자라서 더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1절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Then Jesus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desert to be tempted by the devil.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은 바로 후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어떤 영적 중요한 사건을 통하여 어떤 믿음의 성취감을 맛본 후 어떤 강한 유혹이 옴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열왕기상 19:1-18에서의 엘리야와 로마서에 있는 7:14-25의 바울)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성공 뒤에 오는 마귀의 시험에 승리하지 못하여 깊은 실패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승리하시기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3:16절에서 예수님 위에 비둘기 같이 임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기름 부은 후, 성령이 지금은 마귀의 유혹의 장소로 예수님을 인도하여 마귀에 의해 유혹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현상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이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 복음의 설명은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성령이 예수님을 인도하여 광야로 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를 받을 당시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단지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몰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은 장소는 어디일까 즉 광야라고 하는데, 그곳은 어느 곳일까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어 성경 NIV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NASB에는 분명히 Jesus was led up 이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up이라는 말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말로 위로라는 말로 예수님은 세례를 요단강에서 받으신 후에 요단강의 위로 올라가셨음을 의미하여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은 받은 장소는 요단강에 인접한 광야가 아니라 조금 더 높은 장소 즉 요단강 서쪽 지방의 산이 많이 있는 외로운 장소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유로 마귀의 유혹을 허락하시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이것을 막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을 사막으로 인도하여 마귀의 시험을 받게 하신 분은 분명히 성령 하나님이시이었다는 것이며 우리도 또한 이 유혹에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마귀에 의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근육을 기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육체적인 근육을 길러, 힘 있고 건강한 사람을 만듭니다.

영적 근육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힘이 있다는 것이며 또한 영적으로도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강화시켜 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시험을 하십니다(이에 관하여는 출애굽기 15:22-17:1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의 단어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뜻에 따라 시험과 유혹을 저는 분명하게 구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성경을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13절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에서 시험이라고 언급하여서 마치 영어로 test라는 말을 번역한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영어 단어 test가 아닙니다.

When tempted, no one should say, "God is tempting me."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험은 하나님이 하시나 유혹은 마귀가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내용도 전혀 다릅니다.

유혹은 사람을 설득하여 어떤 잘못을 결정하거나 잘못 된 일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확실히 바로 알게 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하여 바르고 옳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유혹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였습니다.

비슷한말로 시련(야고보서 1:2-3)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련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른 일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은 사단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실제로 그러한 경우를 만났을 경우는 그것을 명확히 차이를 구분하여 대처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에서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을 인도하여 사단의 유혹을 받을 장소까지 인도하셨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사단과 맞서 싸워 먼저 이겨야만 당신의 하여할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단의 작은 유혹이나 또는 커다란 유혹에 반드시 이기어야만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말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사단의 유혹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조차도 결코 하나님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devil)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고소하는 사람(accuser)이라는 말이며 히브리어로 사단(Satan: v10)이라는 말도 마찬가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기억하여야 할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 즉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천사 장이었으나 하나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의 우두머리이며, 끝내는 영원한 불 못에 던져 심판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에 관하여는 욥기 1장과 2장, 스가랴 3:1-2, 역대상 21:1, 누가복음 10:18, 그리고 요한 계시록 20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인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게 하여 범죄하게 하거나,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도록 유혹 할 수 있으나, 사단은 스스로 독자적으로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것과 같이 우리를 멸망시키거나, 또는 우리를 파멸하게 할 수는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마귀를 뜻하는 다이아볼로스(diabolos)라는 말은 그 말이 다이아발레인(diaballein)라는 동사에서 나왔으며 분리시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가 하는 일은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을 무시하게 하여 하나님을 따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언제 이 사단(마귀)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2절입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After fasting forty days and forty nights, he was hungry.


여기에서 말하는 40일 밤낮이 의미하는 바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전에 40일 밤낮을 금식하였습니다(출애굽기 24:18).

예수님 또한 복음을 세상에 전하시기 전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음식의 공급에 의존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하였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민수기 18:15,18, 그리고 사도행전 3:22)이며, 새로운 이스라엘 (마태복음 2장)이신 예수님은 비슷한 시련과 또 비슷한 열정을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물로 세례를 받은(고린도전서 10:1-2) 후에 시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과 같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후 유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통과하시고 있습니다.

첫째 아담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었으나(창세기 3장), 둘째 아담인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어 우리의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하셨는지에 대하여는 마태복음이나 다른 복음에서조차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어서 왜 금식하셨는지에 대하여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그 당시에는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하여 또는 영적인 예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또는 무엇을 깊이 생각할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위하여 때때로 금식을 해왔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의 상상입니다만, 예수님은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공적으로 시작하시기 전에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실 것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전적으로 제 의견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금식 후, 예수님의 배고픔을 마귀가 이용하여 유혹의 기회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모자라서 우리가 어떤 것을 몹시 갈망할 때 마귀의 유혹이 그것에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4:3-4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에서 사단을 시험하는 자 혹은 유혹하는 자로 표현함으로서 이 별명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마귀의 고유한 일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꼬이고, 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는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유혹하는 자 사단이 예수님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여 읽으실 것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라고 함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 마귀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문장에서 if로 시작되는 조건 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마귀가 혹시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정 하에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틀림없다면 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조건법 즉 앞에 if로 시작하는 문장을 그리스어 문법에서는 제일계급 조건절(?: the first-class conditional clause)이라 합니다. 이것은 가정법 문장과는 구별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이 야곱서 2:19절에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지 또는 믿지 않는지 확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는 것이 틀림없으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우리가 이 마귀의 유혹에서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하였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무엇으로도 그것을 가지고,  빵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을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예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예수님의 문제는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게 하여 완전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지금 예수님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고 네 배고픔을 네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배고파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예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서 기도만 하면 모든 먹는 것이 다 해결되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문제를 다 열심히 일하지 않고 기도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학교에 갑니다. 물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해야 하지만.........


사실 믿는 자들이라면 이런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많이 하여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능력이 자기에게 임하여 자기도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면 어떤 기도든지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자랑하는 어떤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분들은 어떤 일이던지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본인 능력스스로 해결하여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바른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내가 하여야 하고, 또 무엇을 내가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참 많이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 사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너도 능력이 있다 네가 하여라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정말 이런 생각도 문제입니다.

영어로 positive thinking이라고 하던가요? 적극적인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빌립보서 4:13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얼마 전엔 가요? 아마 몇 년 되었을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라고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기 최면의 일종이죠.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계속 큰 소리로 반복하여 자기 스스로에게 말함으로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은 내 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셔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자들과 같이 사단은 우리에게 주님의 도움이 없이도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무한한 힘이 내 속에 잠재해 있다고 말함으로서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착각하게 하며, 또 스스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내가 하기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유혹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쉽게 넘어갑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너 배고프지? 돌로 떡으로 만들어 먹어 너도 할 수 있잖아?

우리는 이때 그냥 넘어갑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해봐?

문제는 이렇게 내가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드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까?

이 떡은 마귀가 주는 음식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 먹으면 됩니다.

마귀의 능력으로 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즉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하라고 제안하여서 마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하려고 하시다가 안 하신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실 마음은 예수님에게는 없었습니다.

이 의미를 정말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런 마귀의 유혹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이곳에서 대답으로 인용하신 성경은 신명기 8장 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의 떡은 음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사람이 떡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고 하여서 떡을 무시하여 즉  그것이 전혀 없어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떡만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도 있습니다.

음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잘 아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의미는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위에서의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읽을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하여 ‘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 절대 음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로구나’라고  제발 결론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또 있습니다. 두 구절만 보겠습니다.


첫째는 로마서 9:13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무슨 뜻입니까?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였으나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에서보다 야곱을 조금 더 이뻐하였다는 말입니다.

이해하십니까?


둘째는 요한복음 12:25절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그럼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였다고 하여서 아무렇게나 본인의 생명을

취급하라는 것입니까? 그럼 심하게 이야기하면 자살하는 사람이 제일 잘하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제발 이런 성경구절은 만나더라도 오해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문제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것보다 저것은 조금 더 낫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도 그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음식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의 약식뿐만이 아니라 즉 우리의 영에 필요한 양식은 세상의 어떤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둘 중 즉 음식과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반드시 선택할 때에는 우리는 서슴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이해하시지요?

마태복음 4:3-4절을 정리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마귀의 유혹과 예수님의 대답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5-7 절입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 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가 하는 말은 시편 91:11-12절을 인용한 것이며,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신명기 6:16절을 인용하시고 계십니다.)


두 번째의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4:8-9절에서는 이것이 세 번째의 유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예수님의 가장 약점이었던 배고픔을 이용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하며 그 유혹을 뿌리 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곳을 공격하여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강점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이 강함을 보고 사단은 그것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단의 믿는 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공격 방법입니다.

처음에는 사단이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우리를 유혹을 합니다.

만일 이러한 공격에서 사단이 패하면 다음에는 우리의 또 다른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우리의 가장 강한 면을 공격하여 우리를 유혹합니다.

예수님을 유혹하는 방법도 이와 같았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그렇게 잘 믿어? 그럼 그 믿음을 증명해봐.

참 이것 정말 쉽게 우리가 넘어지는 유혹입니다.

얼마나 이것 때문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지금 사단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다 믿어 그러면 뛰어내려봐!

약한 것으로 사단이 유혹하였으나 그것에는 미혹되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아니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는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런 종류의 유혹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아마도 믿는 사람들이라면 사실 이런 의구심(?)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할까요?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 내 믿음을 하나님께서 정말 어떻게 나를 생각하시고 계실까라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자신감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 믿음에 근거하여 내가 어떤 것을 기도해도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이 우리의 이런 믿음을 이용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어 그래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그래 그럼 이것 좀 기도해봐 들어주시나. 그래 기도해.

그러면 본인도 ‘그래 맞아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정말 들어  주실 꺼야’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죠? 그럼 제발 내 체면 좀 살려주세요’라며 기도합니다.

간절히 그리고 또 간절히 기도합니다. 참 미치는 일입니다.

들어주시면.......? 안 들어주시면...?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아주 많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암에 걸린 여자 집사님을 위하여 온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기도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집사님을 치료하여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이것이 한결같은 목사님을 비롯한 장로님들 그리고 전 교인들의 기도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간절한 기도에도 그 집사님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뭐 괜찮겠지만,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거나 또는 교회에 처음으로 나와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것을 보시며 그들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조건 하나님에게 어떤 결정을 강요하는 기도의 태도는 정말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살펴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시기가 임박한 것을 아시고 간절히 그리고 또 정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26:39 절입니다.

조금 나아 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리고 다시 42절입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 하신 기도의 태도입니다.


만일 우리라면 아마 이렇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 잔이 지나가게 하여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내가 마시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확실히 믿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제발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그런 일을 제발 더 이상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5절의 거룩한 성과 성전 꼭대기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의미하며 마귀는 예수님을 이 성전 위에 데리고 올라가서 하나님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시어서 아니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려 하나님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시어 너를 보호하나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누구보다 성경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용하는 성경을 인용합니다.

시편 91:1-3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리고 11-12절입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며, 또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네가 정말 믿는다면 네가 믿는 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는 유혹하는 방법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고 뛰어 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보증합니다. 100% 사망입니다. 정말입니다.

만일 거짓말이라고 생각이 드시면 정말 시도해 보시지요.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강제로 역사하시게 강요하는 어떤 상황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잊지 마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8-10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번 셋째 유혹에서는 사단이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줍니다. 즉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리고 그들의 웅대함과 또 세상의 모든 화려함을 예수님에게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나한테 경배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다 네게 주겠다.


사단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와 온 세상을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에서 구원하여 우리와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지금 마귀는 자기에게 경배하면 이 세상을 모두 예수님에게 주겠다, 즉 오신 그 목적을 쉽게 이루게 하여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범하는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선하다고 하여서 그것을 이루는 방법인 수단은 조금 잘못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생각을 갖기 쉽다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심지어는 남을 조금 속이더라도) 많은 재물을 만들어서 그 재물을 선한 일 즉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면 재물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잘못된 행위는 모두, 아니 모두 다는 아닐지라도 얼마쯤은 보상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데에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한 사람도 구원하실 수가 없습니까?

내가 재물로 하나님을 돕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것도 무에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항상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반드시 언제든지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이것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바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에서는 정말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내가 사정이 있어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조금 더 사랑하지만 나중에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목적을 달성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 또는 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겠다 라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믿음의 생활은 균형이 있는 것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균형을 의미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해서는 안 되는 것 들 입니다.

이중에서 제일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머지 것들 즉 가족,   내 이웃, 그리고 내가 사는 나라를 전혀 돌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초개같이 버려라 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로 선택하여야 할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이 이에 속하는 사람들이 보여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가족을 버려야만, 또는 내 이웃을 버려야만, 또 내 나라를 버려야 만 정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발 표현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였다 하여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완전히 맡겨두고, 하나님의 일만을 하여야 하는 매우 특별한 분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일을 하면서도 자기 가족을 위하여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단과 타협(?)하여 마귀에게 경배하고 이 세상을 다 얻었다면 그 후에는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났었겠습니까?

사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다시 돌아왔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의 역할은 아마 잘 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때문에 고통 받고 죽어야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도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편한 길을 버리고 왜 그 힘든 길을 가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의미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기 위한 구원은 즉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은 우리를 지역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인 즉 우리의 영적인 구원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단은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즉 예를 들면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우리 인류를 가난과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해방신학). 예수님이 병든 자들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전부 다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친구이며, 예수님은 병든 자의 친구이며, 예수님은 고통 받는 자의  친구입니다만, 어느 한 부분에 속한 자들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것은 세상적인 기준의 메시아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메시아입니다.

이 차이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이며 또한 정말 매우 커다란 차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명확히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4:10 -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에 대하여 마무리하기 전에 잠깐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마귀의 유혹을 예수님은 이기셨습니다만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던 마귀가 과연 예수님이 자기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유혹하였느냐하는 의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궁금한 사항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신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마귀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으며, 만일 예수님이 승리하실 가능성이 없었다면 성령이 예수님을 결코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은 또한 완전한 인성을 가진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히브리서 2:14-18과 그리고 4:15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8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리고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아무리 마귀의 유혹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에 넘어갈 분은 아니실 것이나, 그러나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경험하심으로 우리 인간의 약점을 이해하시어 시험받는 자 우리 인간을 도우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둘째 잠깐 생각해 볼 것은 마태복음 4:8-9절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것과 같이 정말 사단에게 이 세상이 전적으로 속한 것이어서, 마귀가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세상을 취급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나 예수님에게 마귀가 제안한 것과 같이 사단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과장된 허세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사단의 유혹과 우리가 싸워야 할 때는 우리는 철저히 혼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하여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의 상황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한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은 대단히 황량한 곳이며, 누구도 없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단을 만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곳에서 사단의 유혹을 맞서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며, 아무런 외부의 도움이 전혀 없는 혼자만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하여 광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단의 유혹을 받을 때에 성령이 주--욱 예수님과 함께 하였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더욱 더 성령이 사단의 유혹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어떤 도움도 주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마귀가 떠난 후에 천사가 예수님을 수종하였다고 합니다.

즉 마귀가 떠난 후에야 천사가 예수님에게 다시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유혹을 받을 당시에

예수님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단의 유혹과 싸울 때에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의지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혼자만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이것에 대하여 우리가 힘을 기르고 무장을 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6:10-17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구경하고 있어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마귀와 싸우마’가 아니며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워서 이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싸워서 내가 이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겨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면류관을 주십니다.

제발 기억하시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10절입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여기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떠났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자기의 패배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예수님을 영원히 떠났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3절입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우리말 성경에서는 얼마 동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an opportune time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opportune이라는 말은 시기적절한 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즉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하는 데에 한번 실패하였다하여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회 즉 다시 유혹을 하기에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23절에 보면 마귀는 다시 베드로를 통하여 그의 입을 빌어 예수님을 다시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또는 서양 그림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항상 흉악하고 뿔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23에서와 같이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정말 위대한 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제자입니다.

문제는 이 베드로를 사단이 이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마귀가 자기의 본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면 우리는 절대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에는 우리의 가장 친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온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방심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그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친구의 모습으로, 때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심지어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성직자(?)의 모습으로도 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때로는 남편의 모습으로 또는 아내의 모습으로도 온다는 것입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또한 내가 그런 마귀에 의하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유혹하는데 내가 마귀에게 이용 내지 사용되어지는 일이 절대 없도록 나 스스로를 조심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시고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12-16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후에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듣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요한이 잡혔으며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이 들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세한 요한의 잡힘과 투옥에 관한 내용은

마태복음 14:3-12절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들은 예수님은 아마도 더 이상 유대 지방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자기가 자랐던 고향,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깐 살펴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물러가셨다는 표현입니다.

영어로 withdraw(NASB)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12절에서도 이미 사용되었던 동사인데 그곳에서는 동방박사들의 헤롯왕을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단어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잡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들으시고 그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에게도 미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하여 갈릴리 지방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요단강의 서쪽, 그리고 갈릴리 호수의 서쪽. 그리고 북쪽으로는 포에니키아 그리고 시리아와 경계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사마리아와 연결되어있는 지방입니다.

지역의 면적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매우 땅이 비옥하여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당한 지방이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입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유명한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셉푸스의 주장에 의하면, 갈릴리에는 당시 약 204개의 마을이 있었고 가장 작은 마을이라도 약15,000명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어서 그 당시 갈릴리 지방의 총인구는 약 3백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약간의 과장이 있다고 하여도 아마도 다른 지방에 비하여 갈릴리 지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 같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갈릴리 지방에는 각지로 갈 수 있는 중요한 도로가 교차하여 사람들이 이곳을 들려 통과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무역이 활발하게 발달되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외지로부터 침략 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인구의 유입과 이동이 활발하였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요건 때문에 이사야 시대부터 이 지방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고, 예수님이 사셨던 1세기에는 인구의 거의 반이 이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조건은 이 갈릴리 지방이야말로 새로운 사상이나 또는 새로운 가르침이 빠르게 받아드리고 또한 다른 곳으로도 빠르게 전달되거나 또는 유입되는 매우 좋은 조건의 곳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요셉푸스에 의하면 갈릴리 사람들은 거칠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어서, 새로운 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특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BC 2 세기부터 이방인에게 의해 약 500여 년 동안 점령당하여 다른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그리스어였으며, 생활 관습에 있어서도 많이 유대인들의 것이 아닌 이방인의 그것을 많이 닮아 있었고 또 그들의 혈통이 순수하지 못하고 이방 사람들의 피가 섞여 있어서, 당시 많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순수한 유대인들이 갈릴리 지방을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경멸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조건, 모든 것을 감안하시어 그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행하지 아니하시고 이곳을 선택하여 이곳에서 시작하신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더 이상 살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을 떠나야 했던 이유와 그리고 가버나움에 정착한 자세한 이유를 마태복음에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누가복음 4:16-30절에 보면, 고향 사람들이 배척해서 사실 예수님은 쫓겨났던 것입니다. 즉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여서 할 수 없이 고향 나사렛을 떠나게 되었으며, 가버나움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 해안에 자리 잡은 곳이며, 나사렛 동네보다는 더 크고 그리고 더 중요한(?) 곳입니다. 사실 가버나움에 대하여는 알려진 사실이 그렇게 많이 있지 않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뜻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이며 이 나훔은 누구인지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큰 도시는 아니었고, 조그마한 그리고 평범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은 어촌이며, 교통 그리고 갈릴리 지방의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고,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을 그의 사역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정착하신 것을 예언의 실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9:1-2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종교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도 가장 많이 이방 세력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잘 아시고 계셨을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사역을 이곳에서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요한의 그것을 계승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후에 예수님은 지체하시지 않고 요한의 사역을 대신하여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회개할 것을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계승하여 다시 회개를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preach,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여기에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17절은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동안의 사역 전체의 요약이라는 것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는 이때부터라는 단어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영어로 from that time on이라고 표현함으로서 그 때부터 계속하여 주--욱 쉬지 않고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17절에 있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동안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체 메시지의 요약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장이기 때문에 한 번 더 다시 읽겠습니다.

17절-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첫째. 우리말 성경이나 영어성경에는 강조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원어 그리스어 성경에는 예수의 이름이 그리스어 문장 상에 있는 그 위치가 강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 스스로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전파 즉 선포하시기를 시작하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제자들이거나 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는 사람이 ‘이것이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다’라고 대신하여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당신의 입으로 이 말씀을 직접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전하여야 할 바로 그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어떤 중요한 국책사항을 새로이 결정하였거나, 또는 국민을 설득하거나, 국민에게 알려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을 때에는  대통령 대변인을 통하여 발표하지 않고 직접 대통령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의 의미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를 대신 시켜 전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직접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씀을 전파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제가 이렇게 반복하여 강조하는 중요성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제가 조금 더 많이 강조하면, 회개하는 것은 정말 우리 믿는 자에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동사 “전파하다”하다고 우리말로 번역된 kerussein(선포하다, 전파하다)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kerygma(선교, 전도)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 kerygma라는 뜻은 ‘to speak out with authority(권위로 큰소리로 소리지르다), to proclaim(선포하다), 그리고 to make a royal declaration(왕명으로 선포하다)이라고 영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위의 의미는 듣는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 듣고 있는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일방적으로 즉 메시아의 권위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선포하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그냥 일어날 것이다라고 전하며 그에 대한 것을 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수님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죄송합니다. 표현력이 없어서요. 즉 이 문장의 중요성을 다 전하지 못해서 제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즉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회개하라 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제발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라‘가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설교가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설득시켜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설교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여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 그리고 끝입니다.

전하는 말씀대로 하시던 하지 않던 그것은 듣는 사람들의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참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2절을 공부할 때에 회개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순히 회개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회개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만, 다른 영어 성경에는 repent(회개하라)를 사용하며 추가하여 다음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repent = to change your mind for the better and heartly amend your ways with abhorrence of your past sins - 과거의 당신의 죄지은 것에 대하여 몹시 혐오 내지 증오심을 가지고 더 좋은 것을 위하여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모두 버리고 다시 새로운 생각을 함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이며, 그리고 이제까지 해 왔던 그리고 가 던 길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길을 감으로 계속하여 가고 있었던 길을 떠나 새로 바뀐 길로 가는 것이 회개의 의미라고 부언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회개하라’라는 의미는 마태복음 3:2절에서 세례요한이 사용한 ‘회개하라’라는 의미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개란 영어로 ‘I am sorry' 즉 ’미안하다‘ 라는 마음만 표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어인 metanoeite(회개하다)라는 말은 비록 그 말에는 어디에서부터 특별히 변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적은 없지만, 진정 회개의 뜻은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 돌아온 작은아들의 모습에서 회개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작은 아들이 하였던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 할 수 있는 그 회개의 참 마음을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스스로 결심하여 회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25-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 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 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 까 함이라

영어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25절입니다.

Those who oppose him he must gently instruct, in the hope that God will grant them repentance leading them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회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어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사도행전 5: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God exalted him to his own right hand as Prince and Savior that he might give 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to Israel.

만일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면서 그냥 ‘I am sorry'(미안합니다)라고 하시는 분은 단지 그 사람의 본 마음이 그 말에 담겨져 있다고 하여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우리가 아내를 향하여 ‘I love you' 라고 하면서 행동은 전혀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주어야 하는 행동이 없을 때, 그 말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때 우리가 마음에도 없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나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의 행위가 따르지 않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조차도 신빙성이 없게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회개에는 그 회개에 상응하는 진실한 행위를 수반하여야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것이 정말 회개한 것입니다.


네 번째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시었지 “너희가 회개해야 천국이 오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즉 우리가 회개하면 천국이 우리 마음에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어디 있느냐의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통 우리 마음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100% 맞는 말은 아닙니다.

나중에 좀더 깊이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천국은 장소적 개념으로 규정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장소적인 개념도 있습니다. 문제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영어로 the Kingdom of Heaven을 우리나라 말로 천국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만 천국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뜻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요한에 대하여 설명 할 때 Heaven은 God이라 이름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the Kingdom of Heaven은 the Kingdom of God이라고 다시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천국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왕국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그 말의 뜻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the Kingdom of Heaven 즉 the Kingdom of God은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뿐만이 아니라 또한 통치권적인 개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소적인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통치권적인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힘이 미치는 지역 즉 하나님의 통치권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항상 통치하고 있으면 내 마음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의 법이 나를 완전히 통치하지 못하면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느냐 또는 하나님은 믿지 않느냐 에도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교회가 다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운영되어지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반드시 장소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은  그곳이 어디이던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입니다.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정리하는 의미로 현재 제기되고 있는 4가지의 견해에 대하여 잠깐 살펴 볼까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즉 완전한 미래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천국에 간다고 할 때 그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역사의 마지막에 종말이 오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둘째는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이 세상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그곳이 어디이거나 복음이 선포되는 곳은 바로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예수님의 법이 지배하는 개인이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린 그 마음은 곧 바로 천국이 있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여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 믿는 자들의 마음이 변함으로 천국이 각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가 이루어 질 때 진정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구원에 대하여 진지한 크리스천이 가지고 있고 천국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관자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의 계획대로 운행하시며,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조금 더 깊은 의미는 마태복음을 공부하여 나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생각할 까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마태복음 4:17절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선언하십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는 그 천국은 나의 회개와 상관없이 이미 가까이 왔으며, 또한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는 회개하여 천국에 합류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하시는 말은 이미 기정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며, 또한 이는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것과 상관없이 회개하라 라고 명령하시고 있는 것은 우리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를 도와  주기 위한 것이며, 우리도 무엇인가를 천국에 관하여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제일 먼저 선언하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며 그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4:17-16:20)의 요점입니다.

물론 다른 말씀도 하시고 다른 것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요점은 항상 이것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주의하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참조 마가복음 1:16-20, 누가복음 5:2-11, 요한복음 1:35-42)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근처의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두 제자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술한 제자를 부르시는 광경은 비슷하나, 누가복음은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에 기술한 내용을 함께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그냥 여기 저기에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가르치시고, 기적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한 것은 제자들을 불러 복음을 체계적으로 전할 조직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조직한 12사람의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세상에 전하여 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을 부르신 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제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 아니라, 물론 나중에는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제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처음에는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도와줄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믿기를 시작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기를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여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간청이 없이 하나님 스스로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몸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먼저 영접하였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찾아와서 제발 제자를 삼아달라고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시는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당신을 제자 삼으신 것 같습니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베드로나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예수님이 제자를 삼을 만한 장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를 선택하시는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었다면 아마 분명히 마태복음에 그 조건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 즉 외적인 조건은 기록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안드레를 제자로 선택한 것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 즉 성실성, 정직성, 근면성, 가능성, 또는 좋은 성품 등과 같은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선택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또는 내가 받을 만한 어떤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입니다.

물론 내가 예수님을 나의 스승으로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것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5:16a 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또한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 23-24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고 11:6 절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둘째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그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그들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배와 아버지조차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습니다.

예수님이 명하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시편 148:5b -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Let them praise the name of the LORD, for he commanded and they were created.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은 말씀으로 명령하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을 읽어보시면 “빛이 있어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말씀으로 명하시어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수식어가 필요합니다만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네요)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아무도 그 말씀에는 거역하지 못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0절입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그리고 11절....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또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말씀을 듣고 우리는 순종한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모든 것을 다 버려 두고 그를

따른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유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정확하게 맞는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생각한 결과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아니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의 논리적인 설득에 감복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닙니다. 또 어떤 축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심지어는 아버지까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제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것이 있습니다.

권위입니다. 이 말씀의 권위가 사람들의 모든 걱정과 모든 염려와 모든 두려움을 없이 하여 주며,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7:28-29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것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권위 있는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그 권위에 복종하여 예수님을 따라 모든 것은 버리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하였습니까?


셋째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부름에 제자들이 곧 즉시 반응하였다는 것입니다.

v20절 -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v22절 -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이나 생각하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리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작용 반작용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르라” - 모든 것을 즉시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다.

평소에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들이 좇아 나선 것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예수님의 소문이 이들에게 들릴 정도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말씀의 권위와 그리고 그 권위 있는 말씀 속에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읽게 하고 배우고, 연구하는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구요.

기억하시고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에서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입니다.

예를 들라고 하면 아마 한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이 말씀 속에 있음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 말씀으로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잊지 마세요.


마태복음 4: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Jesus went throughout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among the people.


마태복음 4:17절에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설교(전파)하기 시작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9:35절에서도 이것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첫째 예수님의 사역이 그 당시의 랍비의 사역(한곳에 자리를 잡고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르쳤음)과 또 요한이 한때 함께 있었다고 생각되는 금란 사람들(한적한 사막에 거주하며)의 사역과는 다르게 어떤 특정지역에 계속 머물러 사람들이 찾아와서 배우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갈릴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적극적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을 찾아 나서서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역내용이 3개의 동사로 표시되었습니다.

1.가르치셨습니다(teaching) 

예수님의 가르치는 것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이루어집니다. 회당의 의미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하며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며,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그곳에 가셔서 가르치신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쳤느냐에 대하여는 많은 학자들이 마태복음 5장 이후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의 내용 즉 윤리와 제자 도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설교(전파:preaching)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전파 설교 kerygma는 지난 시간에 잠깐 살펴본 것과 같이 사실을 권위를 가지고 알리는 것이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good news, wonderful news,- euaggelion)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우리에게 ‘지금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태도’에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라는 윤리 도덕적인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설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3. 고치심(healing)입니다.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among the people.

모든(every)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잘 아시고 계셨기 때문에(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셨고(회개와 변화), 또 사람들의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어려움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언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과 연약함을 고치심으로 그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고치는 사역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또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사람에게만 한정하여 그 사람만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전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모든 사람들의 병과 모든 사람들의 약한 것을 고치시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심뿐만이 아니라 그를 모르는 사람들의 구세주도 되셨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구세주임과 동시에 우리가 겪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심으로 우리의 육체적인 구세주도 되심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4: 24-25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소문이 점점 이웃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이 온 나라 즉 갈릴리 그리고 갈릴리와 인접한 이웃나라인 수리아(지금의 시리아)까지, 그리고 데가볼리(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며 요단강 동쪽의 모든 지역을 말함),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곳에까지 퍼져 그곳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갈릴리에 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갈릴리 지역과 바로 남쪽으로 인접한 사마리아 사람들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곳을 예수님은 나중에 방문하십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만, 예수의 이름으로 확실히 병을 고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되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에 동기가 되는 것을 부인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것 때문에 모인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병 고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또 그 형제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아실 것입니다(v20-22).

우리가 정말 이것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어떤 호기심 때문에 모인다고 하여서 그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 환영은 단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문제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돌아가시게 하는 데에도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오시기 시작하였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아시고 계시지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믿음을 소유하시어 주님께 칭찬 받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PS. 마태복음 5:1-7:29가지는 산상수훈 또는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이 산상 설교는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윤리행동강령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매우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시길 이 성경공부를 통하여 이해하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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