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Ⅰ. 교부시대 교회론
1. 속사도, 변증론자들의 교회론
교회를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유로 뽑으신 백성, 즉 새로운 단체라고 하였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서 유대人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다. 교회는 이단을 막고 공동 교회로서 존립을 위하여 사도의 후계자들인 감독이 다스리는 유형적 조직체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1) Clement of Rome(100년경)
교회의 직책을 감독, 집사 두 직분으로 구분하였고, 감독은 사도를 계승(apostlic succession)한 것이라 하였다.
(2) Ignatius of Antioch(115~117년 경 순교)
교회의 직분을 감독(한 교구의 군주형 감독), 장로, 집사, 3직분만을 인정하였다
Clement of Rome 와 Ignatius of Antioch 에 의하여 직급제(hierarchy)가 형성된 것을 본다.
(3) Ignatius의 공교회(Catholic Church)관
① 지역교회보다 우주적 교회가 앞선다.
② 교회란 다스리는 유형적 조직체다.
③ 교회는 기록된 전승(written tradition)을 소유하였다
④ 개교회는 공교회의 한 부분이며, 공교회에 예속되는 한 참된 교회다.
2. 분파들의 교회론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에 반동적으로 일어난 분파들이 있으니 그것은 155년경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서 일어난 몬타나스파(Montanist)와 250년경 로마 의 장로 노바티안에 의해 일어난 노바티안파(Novatian), 303년경 아프리카 칼타고에서 분파된 도나티스트(Donatist)파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회의 순수성 옹호에 노력하였고, 교회적 훈련과 순수한 교인들의 자격을 주장하였으며, 무가치한 교직자들을 거절하는 한편, 교회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교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참된 교회의 표라고 하였다
◉ 세 분파의 핵심 문제점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세례(Baptisim) 이후 중죄는 어떻게 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Montanist들은 순교로만 용서 가능하다고 하였으며
Novatian들은 교회는 중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하였고.
Donatist 들은 중죄는 용서도 안되고, 중죄인은 성례를 해서도 안 된다고하였다
속사도 허마스(Hermas of Rome)는 목양서(Shepherd)에서 용서의 천사로. 딱 한번 중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3. 키프리안(Cyprian 200~258년,순교자)의 교회론
246년 개종했고, 249년에 Carthago 감독이 되었다.
「On the Unity of the Church」에서 그의 사상을 볼 수 있다.
① 감독 중심의 교회를 체계화했다. 감독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감독은 사도의 계승자다.
교회의 통일성은 감독단에 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② 유형적인 통일체로서 공 교회 개념을 분명히 한 것을 본다.
4.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의 교회론
387년 암브로스(ambrose)에게서 세례 받았고. 391년 Hippo의 장로가 되었고. 396년에 감독이 되었다.
⑴ 「Enchiridion」(편람서manuel)
구원에서 예정을 강조하고. 따라서 교회는 선택 받은 자의 총체라고 했다. 개신교적 사고였음을 본다.
⑵ 도나투스파(Donatist)와 논쟁 과정
① 유형적 교회는 선인과 악인을 포함한다.( 중생한 자들의 교회라는- regenerate church membership 개념을 포기하였다.
② Donatist 파를 교회에 재 영입하는데 실패하고 눅 14∶23을 근거하여 이단 처벌을 위해서 국가의 강제력을 인정한다.
Donatist 파를 교회에 영입하려고 한 이유는 공 교회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③ 유아의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세례 받기 전에 죽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성례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④ 성례전의 조건으로 규칙적(regularity), 타당성(validity)을 들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의 교회관이 되었다.
⑶ 신국론(City of God)
Goth족 지도자 Alaric이 410년 로마를 약탈했을 때, Augustine의 친구가 ‘약탈의 원인이 된 것은 기독교 때문이지 않느냐?’
는 것에 대한 답변서이다.
① 1부∶재앙의 원인은 우상숭배 때문이다.
② 2부∶역사의 전개는,
City of God = 택자로 구성. 아벨→택자 계보로 이어진다. 참된 행복이 있고, 점차 성장하여 완성하여. 종말적 승리를 하게 된다
City of Earth = 택자+불택자로 구성. 가인→지상 도성으로 이어진다. 흥망성쇠가 지속되다가 결국 패망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교회는 천국이라는 명제로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성도와 악인,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를 비교하여 결과를 이끌어 내고 있다.
Augustine의 주장인 City of God은 로마 카톨릭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후대 로마 카톨릭은 이것을 이용하여 City of God 이 로마 카톨릭이라 여겼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며, 참된 사랑의 특징을 가진 선택자들의 단체로 생각하였다.
참된 교회는 공동 교회이며, 여기에 사도적 권위가 감독의 계승에 의하여 계속하여 지탱한다고 하였다.
Ⅱ. 중세기의 교회론
중세기의 교회관은 Cyprian의 감독 교회 주의와 Augustine의 오해된 신국론 사상이 합성되어 직급제 교회를 이루었다
1. 교황 사상의 발전
그레고리 (Gregory) Ⅰ세(590~604) 는 로마 감독의 우주성을 강조하여. 교황권의 기초를 놓았고. 보니훼이스(Boniface) 3세(607년)는 Universal Bishop 이 되었다. 로마 감독의 우월권은 동방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서방에서는 인정받았다.
◉ 로마 감독이 교황된 이유∶
① German족의 대이동(5세기)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심되는 나라도 없고, 문화도 없으므로 “로마 감독”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② 로마는 서방 유일의 사도적 교회였기 때문이다.
③ 로마는 330년 이전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었다.
④ 로마 감독은 베드로 후계자란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⑤ 로마 교회는 정통교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2. 신국과 로마 카톨릭을 동일시 한 결과
① 가정, 학교, 예술, 상공업 등 모두를 교회가 지배하게 되었다.
②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서만 구원이 온다고 주장하여. 성례전 중심주의 교회가 되었다
③ 교회가 영혼 구원보다는 정치적인 권세를 행세하므로 교황과 황제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3. 로마 교회의 교회관
⑴ 트랜트(Trent) 요리문답
교회는 이 땅 위에서 무형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로마 교구를 관할하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한 분 유형(有形)의 지도자를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신실한 자들의 단체다라고 하였다.
⑵ 벨라마인(Bellarmine) 추기경(1542~1621) : 로마교회 교회관을 잘 보여 준다
① 교회는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단체이다.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감독은 사도의 후계자이다.
감독은 제한된 권위를 가졌다. 교황은 특별 사제직을 가진다.
②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를 구별해서, 교황을 머리로 하는 성직자 단은 가르치는 교회이고,
전 신자는 듣는 교회라고 하였다. 듣는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③ 교회의 영혼과 몸을 나누어서 교회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고(그러나 그 은혜는 상실할 수 있다)
교회의 몸은 외형적 신앙 고백 자들이다.
④ 교회는 은혜의 분여(分與) 자이며 은혜의 기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유형교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고, 유형교회가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이끈다. 유형교회가 무형교회보다 앞선다.
⑤ 교회는 전적으로 구원의 기관 즉 구원의 방주이다. 교회는 세 가지 기능이 있으니 그것은
첫째 말씀의 선교에 의하여 참 신앙을 전파하는 것,
둘째 성례를 행하므로 거룩하게 하는 것,
셋째 교회법에 따라서 신자를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Ⅲ. 종교 개혁기의 교회론
1. 루터의 교회론
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영적 집단이라고 하여 교회의 무형성을 강조하였다
② 교회는 말씀과 성례에 의하여 유형성을 갖는다.
③ 외형적 교회는 위선자나 악인도 포함될 수 있다.
④ 특별 사제직(교황)을 제외하고 전신자의 제사장 직분을 강조하여T다.
2. 재세례파(Anabaptist) 교회론
스위스의 형제단, 남부독일의 anabaptist, 모라비아의 후터파, 화란의 menno파 등이 있는데
침례교회와 비슷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펠라기우스주의에 가까운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① 교회는 신자들의 교회인데, 신자는 자유의지로 믿는 자를 가리킨다.
② 유아는 아직 자유 의지적 결단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일반 속죄로 원죄는 없고, 자범죄는 아직 없는 상황이므로
세례 받지 않아도 구원받는다. 세례 받을 필요가 없다.
③ 교회와 국가는 절대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공무원이 될 수 없고, 서약하거나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④ 세례는 마지막 종말의 택자를 인치는 표다. 관수례(灌水禮)를 하였다
3. 개혁파의 교회론
(1) 교회의 참 본질관 : 영적 실제로 무형교회에서 찾는다. 루터파와 일치했다,
ⓐ 성부의 택자이다
ⓑ 성자의 속죄 대상은, 성자의 몸인데 그것은 성자의 자기 백성,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백성, 양, 교회이다.
ⓒ 성령의 전(殿)이다
(2) 루터파와의 차이점
루터파 ― 교회의 통일성은 말씀과 성례라 하였고, 성례전을 강조하였다
개혁파 ― 교회의 통일성은 성령과 신자의 주관적 교통이라 하였고, 성령은 말씀과 성례라는 객관적 의식에 따라 교회 안에서
주관적인 뜻을 따라 역사 하시며.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역사 하신다고 하였다.
(3) Calvin의 교회관
▶ 교회의 4대 속성
ⓐ 하나다. ⓑ 거룩하다, 성도로 구성한다.ⓒ 우주적 교회다.ⓓ 성경과 사도의 가르침에 근거한다.
▶ 3대 표지
ⓐ 말씀의 진정한 전파 ⓑ 성례전의 적합한 시행 ⓒ 권징(勸懲)의 신실한 이행
▶ 교회의 2종류
.안 보이는 교회(invisible church)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 외형적으로 신앙 고백하는 자들이니, 위선자가 포함될 수 있다.
▶ 4직분
.paster(목사) .elder(장로) .doctor(교사) .deacon(집사)
▶ 교회와 예배
.주일 ― 찬송, 기도, 말씀연구, 성례전 참여, 헌금, 교회 권징, 사도신경 암송.
▶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는 완전 분리는 불가능하고 둘 다 하나님의 기관인데 기능의 분리로 나뉜다.
Ⅳ.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론
1. 아르미니안(Arminia)파, 소키니안(Socinian)파의 교회관
(1) 아르미니안파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도의 무형적 단체라는 것을 부정하였으며 오히려 그것을 유형적 단체로 만들었고. 징계권을 정부에
넘기므로 교회의 독립성을 상실하였고, 교회는 다만 복음을 선전하며 그 회원을 훈계하는 권리만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2) 소키니안파
무형 교회를 말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교회의 무형적 성격을 부인하고, 유형교회 만 인정했다.
기독교를 하나의 교리에 지나지 않다고 하였다.
2. 라바디(Labadists)파와 경건파(Pietsm)의 교회관
(1) 라바디파
로마 캐토릭 사제였던 Jean de Labadie가 1650년 개신교로 개종하여 단순생활을 강조하고, 자녀와 재산을 공유하며,
예언의 계속성을 주장했던 신비주의자들로서 유형 교회를 무시했다.
그는 1669년 복음 회중 교회(Evangelical congregation)를 설립하고 여기는 참 신자만 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
(2) 경건파
기독교의 실천적인 면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들은 세속주의와 싸웠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죄의 조직체로 보았고,
모든 각성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영혼을 세상에 빠트리지 않기 위하여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조직된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을 요구하고, 비밀예배 장소에서 그들끼리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3. 로마 카톨릭 교회관의 갈등
(1) 승려 정치 제도를 확립하고, 교황의 권위를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1791년 영국에서 교황 무오설이 주장되고, 1870년 바티칸 회의에서 교황 무오설 공인되었다.
1950년 Pius Ⅻ는 성모는 죽지 않고 몸이 그대로(夢召―죽지않고) 승천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통일성은 영적 목적의 통일이 아니라 조직으로서의 통일에 지나지 않음을 본다.
(2) 개신교에 대한 태도
.1963~65년 2차 vatican 공회에서 John 23세와 Paul 6세는 개신교에 대하여
이교적(異敎的 heretic)인 자들이라고 하던 것을, 분열된 형제들(separated Brethrer)이라고 수정하였다.
4. 칼 발트(Karl Barth 1866~ )의 교회관
스위스 Bern 출신. 독일 자유주의 신학, Safenwil에서 목회 하다가 1차 대전을 맞았다.
Nazi 집권후 GermanChristian(나치즘에 굴복한 기독교)를 고백교회의 모임에서 Warmen 선언하였느데,
핵심은 GermanChristian을 정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3년 추방을 당한다.
스위스로 가서 바젤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1968년에 은퇴한 6년 후에 사망하였다. 500여권의 장서가 있다.
그의 핵심은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 그는 말씀의 신학을 제시하면서
① 계시된 말씀 ② 기록된 말씀 ③ 선포된 말씀으로 구분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 교회관 (Christocentric) : 이중(二重)예정을 주장한 것을 본다.
하나님은 누구를 택하셨는가? 성자 예수님을 택하셔서 예정하셨다.
① 모든 사람을 위해서 택자가 되었고,
② 모든 사람을 위해서 유기자가 되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모두 택하셨다.
죄란 택자의 은혜 받은 사실을 모르는 것이 죄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택자 된 것을 깨달은 자들이 교회라고 생각하였다.
5.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의 교회관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다가, Frankfurt 대학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23년 미국 Union, 하버드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3권의 조직신학 책이 있는데, 성경 구절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보수주의는 복음에 집착해서 상황을 무시하고, 자유주의는 상황에 집착해서 복음을 무시한다고 하면서
복음과 상황을 상관 관계 시키는 것에 집착했으며. 상황을 주시하므로 진리를 희생시킨 것을 본다.
▶ 하나님을 Being itself로, 예수님을 New Being으로 여겼다.
그의 교회론은 교회와 세상의 구별은 없고, 세상은 잠재적인 교회다라고 한다.
6. 한스 큉(Hans Küng)의 교회관
Tübinggen 대학 카톨릭 신학 교수였고.
제 2차 바티칸 교의(敎義)를 맡은 교수였으나, 교황 무오설을 비판하다가 교황에게 정죄 되었다.
사제직은 파직되고 교수직만 인정되었다.
▶ 교황은 무오의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다라고 갈파했다.
이 셋은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세상에 대한 공통적 임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① 신앙이 전체의 몸인 신자 ② 사도를 계승하는 성직자 ③ 사도 베드로를 계승하는 교황
Ⅴ 성례론(聖禮論 Sacraments)
1. 종교 개혁 이전의 성례론
(1) 초대교회의 성례론
초대교회는 신성하다는 개념이 붙여질 수 있는 것에는 무엇에든지 이 말을 사용했다.
터툴리아누스는 이 말을 창조주의 사역과, 성육신한 성자의 사역과, 성자의 죽음에 사용하였다.
후에 이 말은 주로 세례와 성찬에 적용되었다.
(2) 스콜라 시대의 성례론
성례를 유형적 표이며 무형적 매개(媒介)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그대로 따랐다
성례의 수를 5가지에서 30가지로 많은 주장이 나왔으나 로마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7가지 성례는 이 시대에 유포되었다.
Peter the Lombard가 7가지 성례론을 주장하였으며, 1437년 플로렌스 회의에서 공식 채용되었는데
세례, 견신, 성찬, 고해, 성직, 혼인, 종유이었다
성례의 물질적 요소와 영적 요소의 관계가 밝히 정의되지는 못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형상만이 외부적 성례가 되기 때문에
성례의 효력은 다만 성례받을 자의 신앙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반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혜는 유형적 성례에 나타난다고 하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성례에 쓰이는 말들이 외부적 표징에서 영적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다.
성례의 효력에 대하여 스콜라 신학은 객관적으로 베푸는데서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3) 트랜트 회의(Council of Trent 1545-1563)의 성례론
캐토릭의 트랜트 회의에서 성례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것들이다.
1) 성례는 구원에 꼭 필요하므로 구원 받은 사람은 성례를 꼭 받아야 하며 또 받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각 사람을 위하여 다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2) 성례는 은혜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 성례는 객관적으로 베푸는 것이다
3) 성례를 진실하게 베풀려는 사제(司祭)의 뜻은 교회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당하다.
4) 세례, 견신, 성직 임명은 받는 자의 영혼 속에 지울 수 없는 특징을 남기기 때문에 이것은 되풀이 될 수 없다
5) 사제만이 성례를 합법적으로 베풀 수 있다.
견신례와 성직 임명은 사교(司敎)만이 베풀 수 있고, 세례는 평신도도 베풀 수 있다
▶ 이 회의에서 7가지 성례가 공인되었다.
2. 종교 개혁 후의 성례론
개혁자들은 로마교회의 잘못된 성례론에 반대하여 성경적으로 바로 잡았다. 개혁자들은 성례의 은혜가 용서하는 은혜라는 주장에 반대하였다. 성례의 효력은 받는 자의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례 자체의 효력이라고 주장하였다.
(1) 루터(Luther)의 성례론
루터는 성례의 역사를 받는 자의 신앙에 좌우된다고 주장하였으나 후에는 표징이며,
인호(印號)인 말씀과 밀접하며, 본질적인 관계를 말하므로 성례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성례가 말씀과 다른 점은 교회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향하여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2) 쯔윙글리(Zwingli)의 성례론
1) 성례란 신앙의 표징이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