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일반

[스크랩]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신학론

춘천 김상호 2009. 8. 17. 06:58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신학론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정승원 합동신학대학 교수
 
불트만은 바르트와 틸리히의 동시대 사람으로 당시 이들 못지 않게 신학적 명성을 날렸다.
그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먼저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을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는 마부르그 대학에서 같이 교수로 일했던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불트만은 조직 신학자라기 보다는 신약성경학자였다. 우리는 불트만하면 양식 비평(form criticism)과 ‘비신화화’(dymythologization)를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에 근거한 그의 성경 해석 방법인 것이다. 실존주의의 중요한 한 작업은 바로 “‘존재’(Sein)를 어떻게 규정하며 그 존재를 위협하는 것들(비존재, 고뇌, 공포, 죽음 등)로 어떻게 벗어나 진정한(authentisch) 존재가 되느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방법론을 취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실존이란 어떤 ‘객관화’(objectified)된 것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개인의 결단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결단’ 혹은 ‘선택’이란 단순한 의지적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존의 증거요 근원이요 주체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 사상이 바로 불트만 신학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신학에도 칸트와 헤겔의 영향이 젖어있기도 하다.
 
불트만 당시 이미 신학계에서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역사적 예수란 복음서의 내용들 이면에 존재했던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의미한다. 즉 복음의 내용은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가 주체이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트만 역시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개념을 기초로 그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신앙의 중심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 (kerygma), 즉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신약성경도 초대교회의 선포를 기록한 문서로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실들 보다는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실존주의적 주장으로 어떤 객관화된 역사적 모습들이 개인(실존)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케리그마를 통한 神과의 인격적 조우(encounter)야 말로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그는 양식 비평(Form criticism)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다.
 
양식비평이란 어떤 문서가 형성됨에 있어서 여러 구전(oral traditions)들이 전해졌다고 보고 그 구전들을 여러 양식(forms)으로 분류하여 원래의 상황(Sitz)들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을 통해 불트만은 지금의 복음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복음서 이 前의 복음”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에 관한 많은 구전들과 이야기들이 존재했었고,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러한 것들을 그들 의도대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즉시,” “다음날,” “길 가실때에” 등의 말들은 여러 다른 구전 자료들을 서로 잇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인위적인 편집을 해체하여 이 기록에 들어있는 구전의 원 형태를 찾아 최대 한도로 최초의 전승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서 안에 있는 문서, 시간, 장소 등의 표시는 비역사적이며 믿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다 떼어내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복음서를 여러 가지 범주들로 나눈다. 예를 들어, 기적 이야기, 예언, 비유, 명언 등으로 나누어 복음서내에 어떤 불연속성과 불일치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범주들을 근거로 전승(history of tradition)에 있어서 어떤 것이 원래의 전승이고, 어떤 것이 이차적 전승이고,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 이야기인가를 나눈다. 그 중에 어떤 것이 예수의 원래의 가르침과 제일 가까운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주장하기를 복음서를 통해서는 사실 역사적 예수 자신에 관해 거의 알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수 없다고 해서 복음서는 전혀 가치가 없고 기독교 신앙이 파괴된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케리그마(메시지)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실존주의적 체계에서는 한 개인의 결단 혹은 선택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역사화된, 즉 객관화된 자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결단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무엇을 선택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이든 비역사적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결단했던 그 메시지가 우리에게 이제 어떤 결단을 불러일으키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화되고 객관화된 것을 의지하고 신앙하는 것은 ‘진정한 존재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참된 신앙의 모습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불트만의 신앙관에는 어떤 역사성이 전혀 결여되는 것이 아니다. 불트만 역시 바르트처럼 두 종류의 역사를 말한다(Geschichte와 Historie). 그는 어떤 합리적인 증명에 근거하는 것은 진정한 실존이 아니라고 한다. 초역사(Geschichte)는 현재 지금 계속 발생되는 사건들로 이룬다고 한다. 십자가의 죽음, 부활, 재림은 우리가 설교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계속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는 일반적 역사의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비록 예수에 대해서 아는 바가 많이 없지만 그의 삶은 메시지의 전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우리 믿음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이지 예수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파라다임을 가지고 성경을 재해석하는 불트만의 신학을 논했다. 계속해서 그의 대표적 신학적 작업인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화’란 일반적으로 ‘실제로 역사속에 발생된 사건은 아니지만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진 꾸민 이야기’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 기록을 다 신화로 돌린다. 즉 진짜로 역사속에 발생된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트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성경을 바라본다. 신화란 시간적인 것으로 영원을 묘사하는 것이며 인간의 것을 가지고 신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대부분의 기록을 신화로 본다. 예를 들어, 천국, 지옥, 기적, 초자연적 사건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에게는 이렇게 성경의 초자연적 내용을 신화로 보는 이유가 따로 있다. 단지 신화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지난호에 언급하였듯이 실존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역사적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실존적 해답을 찾을 길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성경이 쓰여졌을 시대와 다르다는 것을 불트만은 강조한다. 즉 현대인은 성경의 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과학적 세계를 믿고, 라디오를 사용하며, 아프면 약을 먹지 초자연적 세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1세기 유대인의 세계관은 삼층적 우주관이었다고 한다. 즉 우주는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 지옥의 삼층 구조로 된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시적 우주관을 가지고 그들의 ‘자이해’(self-understanding)를 표현한 것이 신약의 신화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학적 우주관을 가진 현대인을 위해서는 이러한 신약의 신화를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불트만에게는 ‘신화’라는 것이 이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다르게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 신화란 일종의 실존적 표현인 것이다. 현대인이 성경에서 진정한 실존적 해답을 얻기 위해서 원시적 세계관에 의해 주어진 성경의 신화적 내용을 비신신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신화화 작업을 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맞는 형태의 메시지, 즉 케리그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신약의 메시지를 재구성하거나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수를 에워 싼 신화를 벗기고 케리그마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불트만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언급한다면, 그는 주장하기를 어떤 텍스트(text)를 대할 때 ‘전이해’(preunderstanding) 없이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의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물음은 우리가 찾는 답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물론 불트만에게 실존적 물음이란 단지 인간에서 시작되어서 인간으로 그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것이다. 초월적 계시의 성격을 띤 실존적 물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월적 하나님은 인간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실존) 대한 물음을 통해 인간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게는 이러한 실존적 ‘전이해’야 말로 성경 시대와 지금 시대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케리그마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학적 접근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인위적 범주에도 구속되지 않고, 과거의 객관적 가르침에 매이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Sitz)에서 자신의 결단에 상응하는 케리그마를 얻겠다는 실존주의적 접근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발상에서는 불트만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초역사(Geschichte)안에서 나에게 새로운 ‘자이해’를 허락할 때에 비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음안에서나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였기(즉 실존적 해답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실존적 메시지(케리그마)에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실존을 위협하는 세상, 고뇌, 죽음의 힘을 극복하는 것이 십자가의 메시지이지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가 구속받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간단하나마 불트만의 신학을 평가하자면, 그의 양식비평에 있어서 복음서의 기록들이 여러 구전들과 이야기들의 편집이라고 하지만 사실 예수의 죽음 이후 복음서의 기록까지 그러한 여러 구전들과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관한 그의 해석은 어떤 합리적 증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철학적 추측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또한 사실 현대인이라고 해도 전혀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자연적인 것에만 있는 것으로 말하는 불트만의 철학적 가정은 일방적이고 또한 그 역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해 맹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불트만은 신학에 있어서 어떤 일반적인 범주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반대한다. 즉 성경의 대부분 언어들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불트만이 쓰는 언어도 자신의 철학, 신념, 전제 등이 들어있다. 그는 슐라이어막허처럼 어떤 주관적 또한 실존적 순간을 계시로 보는데, 그 순간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일단 언어로 표현되면 그 순간이라는 것이 사라지게 마련이고 실존적 의미가 사라지고 일반화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성경이 과거의 기록이라고 해서 그것을 추상적이고 구체성이 결여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객관적인 것이 왜 우리 믿음의 보증이 되지 못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객관적인 보증은 (예를 들어, 언약 같은 것)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불트만이 주장하는 예수님의 신성이나 구원에 관한 교리는 예수가 ‘나에게’ 어떤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리츨 신학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주관주의가 확실한 객관적 증거(성경, 자연 계시, 역사 등)보다 더 나을 것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단지 ‘내가 법이라’는 불트만 개인의 자율성에 불과하지 않는가?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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