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하나님은 목부 아벨이 드린 양만 받으시고, 농부 가인이 드린 곡식은 거절하셨는가?
“그가 또 가인의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2-5).
종교의 핵심은 예배이다. 선악간의 영적인 대쟁투의 초점도 참예배가 무엇이냐에 달려있다. 예배를 중심으로 한 대쟁투의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이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을 단순히 읽은 독자들에게 이 사건은 의아하게 다가온다. 아벨은 양치는 자인 목부(牧夫)인지라 하나님께 양을 드렸고, 가인은 농사하는 농부(農夫)인지라 곡식을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목부인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 하나님은 농사는 싫어하시고, 목축만 좋아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추방된 사람에게 “토지를 갈”(창 3:23)아 농사를 짓는 것을 그의 본업으로 지정하셨다. 이 사건은 이런 표면적인 사실들만 놓고 볼 때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 예배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 예배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는가?
첫째,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는 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제물의 차이는 그들의 직업에 다른 자연스런 결과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의 제사는 직업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차이었다고 증거한다(히11:4). 아벨은 직업에 의해 양을 드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양을 드렸다. 사실,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원리를 살펴보면 가인과 아벨은 직업과 상관없이 제사는 양으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에게 그 죄를 해결할 “여자의 후손”(창3:15)이라고 명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담의 믿음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에게 “가죽옷”(창3:21)을 해 입히셨다. 이 가죽옷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옷은 인간이 만들어 입은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이다. 이 때까지 인류의 첫 조상은 자기들이 만든 무화과 나뭇잎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의 노력으로 죄를 가리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셨다. 가죽옷이 생기려면 반드시 한 무죄한 동물이 죽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여기서 동물이 대신 죽어야만 죄로 인한 그들의 벌거벗음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타낸 것이다. 그래서 구속의 기본 원칙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여기 창세기 본문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해 대신 죽은 동물이 “양" 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로부터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계13:8, KJV, the lamb which was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이라고 소개한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노력과 정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흠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앙이다. 인류에게 참으로 유익한 교훈과 가르침을 준 위대한 스승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무죄한 생애를 사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을 당하신 구주는 오직 예수뿐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구속된 것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벧전1:18,19)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요14:6;행4:12).
이러한 구속의 원리가 아담과 하와에게 창세기 3:15에서 “원 복음”(proto-evangelium)으로 주어졌다. 그들은 이 허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창세기 3:24에 묘사된 에덴 동편으로 나아가 여자의 후손을 표상하는 어린 양을 잡아 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구속의 경륜을 자녀들인 가인과 아벨에게도 교육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 아벨의 제사는 회개와 믿음의 제사였지만, 그것을 거절한 가인의 제사는 다만 인간의 정성으로 드린 제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다고(히11:4)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벨의 제사는 십자가의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그것을 거절한 것이었다. 엘렌 G 화잇도 이들의 제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죄가 있을 수 없다. 자들은 양떼의 처음 난 것들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약속된 속죄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저들의 믿음을 나타내야 했다. 이외에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써 주 앞에 바쳐야 했다”(pp. 71).
둘째, 아벨은 첫 양을 드렸지만, 가인은 보통 곡식을 드렸다. 창세기의 본문에는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창4:2~3)다고 하여 분명히 가인의 제물에는 “처음”이란 단어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아벨은 자기도”(감후, he also)라고 했으므로 이미 가인이 “처음 곡식”을 드렸다면 장자의 제물에 대해 성경이 생략하였을 리가 없다. 오히려 성경은 “가인이 첫 곡식을 드렸고, 아벨도 양을 드렸다”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문법적으로도 목적어가 같으면 그것을 앞의 문장에다 표현한다. 예를 들어, “민수가 책을 가졌다. 나도 가졌다”라고 한다. 그러나 목적어가 다를 경우에는 “민수가 책을 가졌다. 나도 노트를 가졌다” 라고 한다. 이럴 경우의 “나도”는 목적어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 “가졌다”를 수식한다. 그러므로 “가인은 곡식을 드렸다. 아벨도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말의 “아벨도”는 “드렸다”를 수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대로 분명히 가인은 곡식을 드리되 처음 수확을 드리지 않았다.
성경에서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물론, 이것이 구체적인 제도로 시작된 것은 유월절 사건 이후이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라”(출13:12)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 제도가 성문화된 것이 이 때이지 그 제도의 정신과 원칙은 처음부터 있었다. 그래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던 것이다. 지혜 자는 “네 재물과 네 소산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3:9)고 권하고 있다.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일조 제도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제도이다. 아벨은 처음 것을 드렸지만, 가인은 그러지 않았다. 한 미디로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소유주가 되시는 “주” 되심을 고백한 것이었지만, 가인의 제사는 그것을 거절한 것이었다.
셋째, 아벨의 제사는 생애를 바친 산 제사였지만, 가인의 제사는 악한 생애의 거짓 제사였다. 모든 진정한 제사는 진정한 삶의 결과이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권하였다. 하나님은 악한 생애를 살면서 제물만 바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신다. 그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성화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1~13)고 하셨다.
아벨의 제사가 바른 제사가 된 것은 그가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른 제사로 이로운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인”(마23:35)이었기 때문에 바른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생애를 살았다. 그래서 요한은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3:12)고 하였다. 가인의 제사는 그의 악한 생애의 결과였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요일3:12) 있으면서, 제물만 “여호와께 드렸”(창4:3)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이 드린 제사의 결과에 대해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 지라”(창4:4)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아벨이 란 사람 자체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이란 사람 자체와 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 없이 제물만 가져오는 것을 받으실 수가 없다. 그건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이런 제사였기에 유다는 가인의 길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 “ 화 있을 진저”(유11)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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