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마태복음5:6(2)

춘천 김상호 2008. 2. 29. 09:45
 

마태복음 5: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의에 대하여 구약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 즉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을 의의 사람이라고 하며 이 의로운 사람이 받는 복에 대하여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신약에 있어서 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B.신약에서는 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리스어의 dikaiosyne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 의 또는 공의 또는 정의입니다.

이러한 공의의 헬라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공의의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공동체 안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가 지켜야하는 모든 의무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지키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헬라적으로 신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신에게 사람이 지켜야 할 모든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시대의 유대교에 있어서 그들이 말하는 의로운 사람이란 문서화된 율법(모세 오경)이나 전통으로 내려오는 규범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그들은 이상하게도 어떠한 아무런 강조나 또는 전혀 이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20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의 의미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지키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의가 아니라 진정한 의의 의미는 율법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의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6과 10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리고 v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에서 의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율법과 의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의는 분명히 그 시대의 바라세인들이나 서기관의 의보다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실 놀라운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라세인 서기관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정말 엄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도 더 이상의 의를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5장을 읽어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너희들이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이....”라고 말씀하시며, 행위를 규제하고 있는 율법을 예로 드시면서, 여기에 다시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다음과 같이 요구한다”하시면서 한층 율법을 지키는 것 이상의 놀라운 명령을 추가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 예수님이 의미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제까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개념에서 말하시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판단하는 행위보다는 행위가 나오는 원인이 되는 마음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21-24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율법은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살인을 일으키는 원인에 그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시며 그것을 금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의를 행위의 개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이에서 그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위의 동기이고, 행위를 일으키는 생각이고, 또 행위를 유발하는 욕망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닮는다 또는 예수님을 닮는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닮기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깐 살펴봅니다.


1. 로마서 1장 - 복음 안에서의 의란?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우리에게 의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으며 이 주제는 로마서 전체가 이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쓰여 있음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의는 믿음으로만 온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인간의 행위와 연관하여 의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의는 창세기 15:6절에서와 같이 믿는 자에게만 귀속되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복음은 좋은 소식이며 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인간에게 대가없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물을 받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만 주겠다고 약속하신 자를 믿고 신뢰하여야 하는 것이라(로마서 10:6, 히브리서 11:7)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로마서 2장 - 3장에서  율법과 의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음.

유대인과 이방인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어떤 사람도 다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또한 3장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위와 같이 바울은 그 시대 유대교의 의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 의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율법과 죄를 연관시키고 있으며, 율법과 의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주장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과격하여서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3. 로마서 3장-4장 : 의와 믿음의 연관성

만일 의를 얻는 것이 율법과 또는 인간의 행위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을 가요?

바울은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보내지는 것이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서 이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모든 사람은 율법을 다 잘 지키지 못하고 그래서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는 절대 의를 얻지 못하고 또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새로운(? 구약과는 다른 개념의 의)의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각 개인의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18-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23절과 24절입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즉 우리는 모두 죄인이어서 의인이 아니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였고, 다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는

것을 바울이 주장하고 있습니다(이것이 이신득의입니다).


4. 로마서 6장-8장 : 의의 실현

여기에서는 바울은 의의 다른 면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어떻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있는지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의와 거룩함에서 (새로이)창조된 하나님과 같은 심성을 가진 새로운 존재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이것을 우리의 예수님과의 연합에서 실현된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자 즉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살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이냐에 대하여 8장 4절에서 말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어로.... who do not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but according to the Spirit....라고 말합니다.

즉 그것은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으로 다시 태어난 자의 삶입니다.

 

결론을 내겠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에서의 의는 어떤 규범이나 어떤 기준에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기준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성격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인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인에게는 많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고, 또한 사악한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오면 이러한 사상 즉 의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생각에

약간의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즉 의와 율법은 서로 연관이 있으며,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 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많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이러한 견해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새로운 의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의는 이제까지의 의의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즉 기존의 의의 개념을 뛰어넘는 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라는 것은 바른 행위에서 오는 것만이 아닌 즉 바른 마음에서 생겨나는 바른 행위를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명령을 외형적으로 따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하나님과 같은 생각 그리고 그 생각에 기초한 하나님과 같은 행위를 할 때 그것이 진정한 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구약 사람들에게는 마음 상태와는 상관없이 외형적으로 만이라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에 이르는 길이었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으며, 구속의 개념이었으나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도 이미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그의 로마서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오는 의에 대하여 더욱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우리는 새롭게 될 수 없으며 새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만이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이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새사람으로 창조됨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외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을 방법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방법이외에는 전혀 다른 방법이 없음을 기억하시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마태복음 5:6절로 돌아갑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러분은 의에 대한 개념을 이미 파악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의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100%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이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복을 원하고 원합니다.

그런데 복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즉 행복이란 어떻게 하여야 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얻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또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많이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많이 그 복을 얻을 가를 항상 생각합니다.

언제나 행복은 우리의 야망이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고  동시에 이것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그리고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고 또 모든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모두 동의하시며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찾아서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여도

행복을 찾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찾았다고 하여도 오래 소유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시적인 행복과 찰나적인 기쁨은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행복과 기쁨은 우리를 피해 사라져버리고 없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세상적인 비극입니다.

무엇이 정말 잘못되어 있습니까?


8복을 천천히 읽어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복 또는 행복은 그것은 직접 찾아 소유하여야

얻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복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정말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행복 즉 복을 직접 찾아 소유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행복을 찾아 소유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하면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잡고, 삶의 목적으로 삼아 열심히 노력하고 또 열심히 노력을 하여야 행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여지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서, 또한 마음이 온유한 자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즉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결코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온유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을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있습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자는 의에 대하여 목 말라하여야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을 의에 앞에 놓고 찾아서는 결코 행복을 맛 볼 수 없다고 말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환자가 그것을 원한다고 하여서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진통제로 처방하여 환자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행복을 맛보게 하는 것이 의사가 할 일입니까?

이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입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서 진통제의 약효가 더 이상 지속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다시 고통이 옵니다.

일시적인 미봉책은 영원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의사가 이 환자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은 고통을 생기게 하는 근원인 병의 뿌리를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병의 근원을 치료하기보다는 진통제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비참하게 하고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진단하여 발견하고 근원적으로 그 원인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진통제만으로 일시적인 행복만을 얻으려하는 것은 다만 비봉 책입니다.


행복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복을 얻으려 노력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의사이신 우리 주님의 처방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연장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우리의 병의 근원을 찾아 치료하여 우리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우리에게 행복을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일시적인 진통제를 주사하여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는 데에 너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항상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 이외는 모두가 다 부수적인 일입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다른 일 즉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또 남을 도와주며 기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많은 사람을 모으고, 또 그들에게 기쁘고 즐거운 시간은 갖게 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이 가능하다는 말에는 경제적, 심리적, 기타 등등 모든 면에 있어서의 마음의 여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제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바랍니다).


정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관계 개선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치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우리 모두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며, 또 예수님을 즉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연합에서 실현된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믿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 새롭게 살게 되며,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그런 자 즉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사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시며, 우리에게 그런 의인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깊어지는 것이며, 믿음이 조금씩 자라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강렬한 욕망이 있는 사람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시는 여러분!

의에 항상 주리고 목마른 여러분은 진정 복이 있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주림은 배부를 것이며, 여러분의 목마름은 충분한 생수로 갈증을 해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주림과 목마름을 충분히 채워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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