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고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추구하는 것은 행복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이란 정말 무엇입니까?
아마 산상수훈 중 8복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복의 개념부터 살펴보고, 무엇이 정말 복인지를 알아야 먼저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무엇이 정말 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의 목표가 이것이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최종 목표가 이것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만, 문제는 어떤 것이 정말 복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잘못 알고 있고 또한 잘못 알기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나쁜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여, 실제로 복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정말 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복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우리는 복에 대하여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 사람보다 많으면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끊임없이 축복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으면서도 정말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그냥 계속하여 복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무슨 복을 원하십니까?
무엇이 복입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어떤 것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축복하셨구나 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처럼 그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이 번성하는 것입니까?
또는 일생동안 쓰고도 남을 만한 재산을 가지는 것입니까?
또는 다윗과 같이 왕이 되어 나라를 지배하는 것입니까?
또는 솔로몬 왕과 같이 많은 지식을 소유하여 지혜가 많은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또는 남이 부러워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또는 남이 부러워하는 멋있는 남자를 남편으로 삼는 것입니까?
또는 세상적으로 훌륭하게 된 자식들을 가지는 것입니까?
‘진보의 역설’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레그 이스터브룩 이며 박정숙이라는 분이 번역한 책입니다.
정말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니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옛날에 비해 경제적으로 참 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진입의 바로미터로 평가받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였고, 한강엔 유람선이 떠다니고 있고, 자가용은 필수품이 됐으며, 냉장고엔 언제나 꺼내기만 하면 먹을 음식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말이면 온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과 야외로 들놀이를 갈 수 있게 되었고, 또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산과 바닷가로, 혹은 외국으로 휴가여행을 떠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저녁이든 새벽이든 전화 한 통화면 원하는 장소로 음식이 배달되고, TV를 보며 원하는 쇼핑도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러나 정녕 우리는 행복한가? 물론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더 잘 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부제를 단 ‘진보의 역설’은 물질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발전했음에도 사람들은 왜 “예전엔 살기 좋았지” “그때가 좋았어” “점점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하는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옛날에는 배만 고프지 않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던 대다수의 사람은 옛날에 비하여 이젠 배는 고프지 않지만, 왜 그에 비례하는 행복감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더 힘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지은이는 현실이 바라던 유토피아처럼 발전한다 해도,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거나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연이어 나타나는 등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기준에서는 유토피아로 보이는 미래사회도 그 시대가 되면 또 다른 새로운 문제가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무리 지금 간절히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언제나 만족감과 행복은 자꾸 미뤄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삶의 질이란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지만 삶에서는 그 의미가 결핍되었다고 느낌에 따라 사회가 ‘물질적 욕구’만이 아닌 ‘의미의 욕구’까지 충족해야 행복한 사회가 성립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은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의 욕구’를 채워주는 방법은 용서하고 감사하고 낙천적인 태도, 즉 이타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긍정 심리학’으로 불리는 이러한 실천행위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은 다시 이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고 지은이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영국 평론가 존 러벅의 말을 인용해 “행복은 바이올린처럼 연습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주장합니다. 행복하고 낙천적으로 살려면 그에 합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신 8복에 대하여 천천히 읽으시면서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결론을 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의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A. 구약시대.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축복 또는 복은 그들의 생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축복의 개념은 성공, 번영, 많은 자손 (특히 암컷의 다산 능력), 장수(오래 사는 것) 등이었습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복을 받은 사람은 경제적으로 부하여 풍부한 삶을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물론 하나님은 모든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셨고, 또한 축복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빌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만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5:12a -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며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며 그리고 재물을 얻을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신명기 8:18a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그러므로 구약에 있어서 복의 개념은 영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신명기 12장, 15장, 28장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였을 까요?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는 사람(시편 1:1), 허물의 사함을 받아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32:1), 여호와에게 피난처를 정하는 자(34:8),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40:4,84:12),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41:1),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112:1, 128:1), etc
이런 복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풍성함으로 재물을 주어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이 구약 시대의 복의 개념이었습니다.
B.신약시대
신약시대에는 복의 개념이 약간 달라집니다.
물론 신약의 복의 개념도 구약 시편에서 언급한 복의 개념과 같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포함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makarios의 의미는 예수님의 8복에 쓰인 것과 같이 그 강조점이 물질을 풍성히 소유함으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복을 받은 사람의 상태를 더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이 blessed(축복을 받은), happy(행복한 or 만족스러운) 그리고 fortunate(운이 좋은 or 행운인) 등으로 번역되는 makarios는 물질적인 풍성함에서 오는 복보다는 정신적인 복을 더 강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8복에서 언급되고 있는 복은 구약 시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복과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매우 그 뜻이 다릅니다.
구약 시편의 복은 축복으로 인도하는 인간의 태도와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8복의 복도 인간의 마음가짐(태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음은 둘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언급한 복에서는 풍성한 삶은 물질적인 축복과 세상적인 축복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많이 다른 점입니다. 즉 구약의 복은 세상적 기준(재산 지위 자손 등)의 복을 더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은 마음의 복을 더 강조하고 있음은 매우 다른 것입니다.
에베소서 1:3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Christ)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즉 물질적인 복보다는 영적인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늘에 속한 복이라고 하여서 내가 죽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들어가서야 받는 복이 아니라 현재 즉 지금 받는 복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 그 복은 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세상을 사는 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면 구약에서의 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축복이었으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신약의 복은 소유함으로 생기는 복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로서
나타나는 현재를 살 맛나게(?: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는 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주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복은 분명히 객관적인 복의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복을 가지고 있는 것. 즉 물질을 소유함은 누구나 다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아무리 무엇이라고 하여도 내가 내 스스로를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축복이다(주관적 개념의 축복)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는(? 참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객관적인 개념 즉 남이 보아도 축복으로 보이는 것이어야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8복에서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설명하기에....
다시 말씀을 드리면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의 개념은 구약 시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복의 개념을 뛰어 넘어 새로운 복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잘 하지 못하였지만 제발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8복을 읽으시며 구약의 시편에서 사용한 복에 대하여 그것을 비교해 보시면 금방 이해하시겠지만 같은 복(우리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복이 의미하는 전혀 아니 그것보다 더 발전된(?) 즉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구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3-11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어 makarios는 복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happy(행복한) 또는 to be congratulated(축하해 주어야하는, 잘되었다고 말하여하는), 또는 to be envied(선망의 대상이 되는)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가까운 의미입니다.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축하해 주어야 하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등과 같이 번역해도 거의 원래의 뜻에 가까운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어떤 신학자들은 8복에 있어서 “복이 있다”의 뜻을 심지어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라고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또는 “나는 네 편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자와 함께 하시며 또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의미로 8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8복의 내용은 기독교를 엄숙하고 또 무엇인가를 항상 지켜야만 어떤 율법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놀라운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항상 지켜야할 규칙만을 강요하고 있는 마치 잘 짜여진 군대와 같은 엄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군대도 그렇게 옛날처럼 딱딱한 곳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과 기쁨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정말 온전한 기쁨이며, 온전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기억하실 것은 8복에서 이야기하는 행복과 기쁨과 복은 막연한 미래에 일어날, 즉 지금 현재에 열심히 지켜야 할 것을 지켜야만 그리고 지키려고 노력하여 열심히 살아야 미래 어느 때에 상급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누릴 복이 아니라, 현재 지금 당장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 순간부터 누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모든 것(정말 모든 것의 의미는 정말 전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 하나님 나라의 복을 현재 누릴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3 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심령이 가난한 자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한 자를 누가복음 평지설교와 비교하여 보면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한 가난한자인가에 대하여 약간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비하여 누가복음에서는 마치 경제적인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처럼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심령이 가난한 자 대신에 그냥 가난한자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적인 가난한 자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결코 어디에서도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이 선한 일이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부자라고 하여서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 복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것에 대하여 정말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성경 말씀 때문인 것 같으나 자세히 연구하여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에 어떤 유리한 장점도 또한 특별한 특권도 아니며 다만 이는 예수님이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또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이외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항상 영적인 축복과 경제적인 축복을 다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별한 객관적인 이유 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서 가난하게 살고, 또한 성경을 잘못 이해함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신앙적으로도 정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즉 요한 3서 2절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건강한 육체와 더불어 물질의 축복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주장입니다(Prosperity Theology).
이런 신학 때문에 우리나라의 교회들, 특히 어떤 교단의 교회를 단시간 내에 한국최대규모의 교회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되었지만 이런 기복신앙으로 인해 기독교의 정신을 훼손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게 받아왔습니다.
문제는 이 물질적 축복은 사실상 한국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신앙의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분명히 말하자면, 이 물질적인 문제가 때로는 교회에서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에 대하여 하나 하나씩 정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5장 3절 8복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심령으로 가난한 자는 누구를 뜻하고 있습니까?
마음에 영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철저히 완전히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 스스로 영적으로 무엇이 필요함을 통감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의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어 완전히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강조하여 설명하다가 너무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정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시편에 기록된 다윗 왕의 시를 읽어보시면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입니다만, 다윗이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풍성히 받은 것은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심령이 가난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하나님나라에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결론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심령이 가난함을 의미하는 지 몇 가지로 나누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A.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을 기독교인 즉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존재는 믿으나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여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trust)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격(?) 즉 마음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성격은 기독교인에게는 필수적인 것이며, 아주 근본적이고 매우 기초적인 성격입니다 앞으로 8복을 하나 하나 살펴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성격이외에 열거하는 다른 성격은 많으면 많을수록 복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 성격 즉 심령이 풍성한 성격만은 없으면 없을수록 더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B.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겸손하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마찬가지로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그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로 상대방을 인정할 때 그것을 겸손이라 하지
무조건 자기를 비하하고 무조건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하지 아니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가 먼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또 하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 내가 그에게 완전히 승복할 때 나는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에서의 다윗의 마음이 이런 가난한 마음이며, 그리고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다음과 같이 고백한 베드로의 마음이 그런 심령이 정말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불붙는 강한 욕구가 있음에도 그 욕구를 강제로 자기의 강한 의지로 억제하여 빈 마음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속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강한 욕망이 있는데 심령이 가난하여 빈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 욕망을 이성으로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말씀에 대하여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적인 생각 즉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 즉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여 승진을 꿈꾸고, 사업에서 열심히 일하여 사업을 번창시켜 재정적으로 부자가 되기를 꿈꾸고
......등등 이런 욕구까지도 버리는 것까지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적인 것에 너무 빠져들어 하나님까지도 버리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너무 이것을 소홀히 함으로서 가정을 유지하고, 행복한 삶을 영유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만드는 것은 더욱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은 항상 모든 일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또 남을 것 같으면 덜어내고 모자랄 것 같으면 더
채워서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균형 있게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성이외에는 교회에서나 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에도 이런
평형을 유지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C.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만이 있어야 하며, 정말 있어서는 반드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과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항상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주 범하는 잘못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너무 지나치게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엇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인 교회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 의존하기보다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합니다.
능력 있는 담임 목사님에게 의지합니다. 능력 있는 장로님에게 의지합니다.
우리 가정을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돈에 더 의지하고 있습니까?
결론을 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항상 하나님에게 나의 눈과 모든 촉각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능력 없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나를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서 천국을 소유하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만을 바라보심으로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천국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며 기도합니다.
어디에서 따온 글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충만하지 않고 겉치레 뿐인 사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사람,
자유롭지 못한 사람, 물건으로 둘러싸인 사람, 절망하고 있는 사람,
친구가 없는 사람은 가난합니다.
부모, 형제를 만나지 않는 사람, 정의에 목마르고 굶주려 하지 않은 사람,
자식을 낳을 줄 모르는 사람, 일과 침묵을 두려워하는 사람,
부자이면서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합니다.
빈자에게는 빵 부스러기를 주면서 곳간을 채우기 위해
세월을 허비하는 사람, 난폭하며 잘 싸우는 사람,
섭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합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 영혼이 가난한 사람,
거저 줄 줄 아는 사람, 소박하게 사는 순수한 사람,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줄 알고, 웃고 있는 사람과
함께 웃을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 진리를 발견하고는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진리를 따라
나서는 사람은 부유합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람에게 아버지가 되어주고 어머니가 없는
사람에게 어머니가 되어주며, 모든 이들에게서 잊혀진 사람에게
형제자매가 되어주는 사람은 부유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진주보다 값지다고 믿는 사람,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합니다.
ㅡ작자 미상,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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