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모세가 비위를 두 번 친 사건이 무슨 뜻이 있기에 하나님은 그 사건 때문에 모세의 가나안 입국을 금지하셨는가?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10~12).
이제 출애굽의 40년이 마쳐가고 있었다. 이 광에서의 40년 동안 누구보다도 고생한 사람은 모세였다. 그는 자기 생명을 바쳐가며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안고 온갖 풍상을 겪으며, 여기 가데스의 신(Zin) 광야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물이 없다고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상에서 가장 온유했던 모세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쳤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하나니은 이 사건을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에 이끌고자 애굽의 보좌를 버리고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한 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가혹한 선고를 내렸다. 왜 그랬을까? 이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이 사건은 출애굽 초창기에 있었던 신(Sin) 광야 르비딤에서의 물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때에 백성들은 물이 없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모세를 원망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17:6)고 하셨다. 그리하여 백성들인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물을 흡족히 마”(시78:15)셨다.
이때 모세가 친 반석은 히브리어로 추르(רוּצ)인데, 그 뜻은 “끊겨 생긴 바위”로 “요새, 피난처” 등을 상징한다. 구약에는 이 추르가 하나님의 상징으로 75번이나 사용되었다(신32:4; 삼하23:3; 시18:2; 사26:4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반석”(마7:24).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롬9:23), “보배로운 산돌”(벧전2:4)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흘려 보내준 그 “신령한 반석”이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때 모세에게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반석 “위에” 서신 후에 그 반석을 치라는 말은 곧 자신을 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표상하는 사건이었다. 엘렌지 화잇도 그리한 설명을 하였다.
“침을 당한 반석을 그리스도의 표상이었고 이 상징을 통하여 가징 귀중한 영적 진리들이 가르쳐졌다. 생명을 주는 물이 침을 당한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왔듯이 ‘하나님에게 맞으며’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림을 받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받은.’ ‘그리스도로부터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pp. 411).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기적적으로 물을 공급받았다. 물론 그 바위가 이스라엘을 따라온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물을 공급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너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고전10:4)셨다고 한 것이다.
“여행하던 전 기간 동안 어디든지 필요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이적을 통하여 물이 공급되었다. 물이 계속 호렙으로부터 흘러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여행 중 물이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진영 부근에 있는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왔다.”(pp.411).
그렇게 기적적인 물 공급을 받으며 이스라엘 자손은 40여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신(Zin)광야 가데스에 도착한 것이다. 가데스에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에서의 자손이 사는 에돔 땅을 통과해야 하였다. 그런데 에돔은 물이 풍족한 땅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데스에 도착하기 전에 모세에게 “너희 동족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신2:4~6)고 하셨다. 그리고 물이 솟는 일이 끊겼다.
“히브리 대군이 가데스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처럼 여러 해 동안 그들의 진영 곁에서 솟아나왔던 신 시냇물이 끊어지고 말았다...기적적으로 물이 솟는 일이 중지된 것은 광야의 유랑 생활이 끝나는 징조로서 기뻐해야만 하였다”(pp. 414).
그러나 그들은 40년 전 조상들처럼 다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며 원망하였다.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20:5). 이에 자비하신 하나니은 다시 모세에게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9민20:8)고 하셨다. 여기서 “반석”이란 히브리어는 쎌라(ע)이며, 그 뜻은 “우뚝 속아 오른 바위”란 뜻이다. 이 단어는 추르와 동의어로서 구약에서 60번이나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되었다(삼하22:2; 시18:2; 31:3등). 주목해야 할 시살은 이때 하나님은 분명히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때 “패역한 너희여 들어라”(10절)고 외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한 거룩한 의분이 아니라 인간적인 격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물을 내랴”(10절)고 외쳤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날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고 외치는 것이다. 그는 순간 마치 그 동안의 출애굽노정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내뱉어 버렸다. 그리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11절)쳤다. 이것은 심각한 불경이었다.
출애굽 사건은 역사 속에 펼쳐진 구속 사건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구속 사건의 중대한 표상을 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피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히9:12)이루셨다.
“그리스도를 상징한 반석은 그분께서 한 번 희생이 되셔야한 것처럼 한 번 침을 당하였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을 간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반석에게 명하기만 하면 되었다”(pp. 418).
그러므로 이제 그 반석을 다시 친 것은 구속의 경륜인 십자가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모세의 역할은 끝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12;27:14참조) 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모세 개인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 선고를 면해 주도록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만 해도 족하니 이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고 네 눈으로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니라”(신3:26~27)고 하셨다. 물론 모세는 이후에 부활하여 하늘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다(신34:6; 유9; 마17: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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