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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여동문회 주최/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김세윤교수

춘천 김상호 2008. 6. 28. 20:19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여동문회 주최
김세윤교수 초청 세미나

교회는 여성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

'여성의 굴종'이 복음에 유익한가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 옹호 위해 성경 가르침 왜곡 해석 이어져 성경은 ‘남녀 동등성’ 강조…공동체 해치는 ‘차별언어’ 사라져야...

김세윤 교수(미국 풀러신학교 신약학)는 ‘목회와 신학’이 ‘여성. 그 복음적 이해와 목회적 적용’을 주제로 엮은 5월호 특집의 글로 ‘성경은 남별?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를 발표했다. 이어 김 교수는 지난 7월 5일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여동문회가 연 세미나에서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했다. 우리 교단 안팎에서 여성 안수에 대한 견해들이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익히 알려진 신학자가 그리고 신학교에서 이 문제를 두고 공개적으로 제기된 논의여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의 여성 동등권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사실상 여성안수에 대한 허용 주장으로 간주한 서창원 목사가 기독신문에 반론의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 교수의 글과 서 목사의 글을 줄여 싣는다(두 필자의 전문은 기독신문 인터넷 판 볼 것). <편집자주>


김세윤 교수는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된 남녀의 동등성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신약에서는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들어 예수께서 여자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 세웠다”며 예수의 남녀 동등성의 원리를 제시하고, 열두 제자 가운데 여성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는 남여관계를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구원이었다”며 “구원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신뢰를 얻고 설득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문화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고린도전서 7장 2-16절,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에베소서 5장 21-33절에 대한 주해를 통해 남녀 동등성의 원리를 주장하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대한 해석학적 견해를 밝혔다.

여자는 교회서 잠잠하라?

바울은 철저하게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남녀 관계를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원칙에 따라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은 이것과 정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구절이 우리의 교회들에서 여성의 설교나 리더십 행사를 부인하는 성경적 근거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본학적으로 불안정하다. 이 34-35절과 어휘나 사상이 같은 본문이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들이 디모데전서가 쓰일 1세기 말 무렵의 영지주의 여자들이 교회에서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질서를 잡기 위해서 씌어졌다고 본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구절들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맥락에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남녀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특히 고린도전서 11장 12-16절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모순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바울은 남녀관계에 있어 일관되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조금 전, 즉 11장에서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자들도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하는데 다만 머리에 수건만 쓰고 하라고 한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썼다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이 쓴 말을 곧바로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자기모순을 범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바울은 한 편지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을 주는 종잡을 수 없는 사도인 셈인데,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신학적인 문제를 안겨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에서 남자의 독점적 리더십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을 디모데전서 2장 11-15절과 함께 계속 바울의 진짜 가르침으로 보고 금과옥조로 삼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한 편지에서도 상호모순되는 가르침들을 하는 사도로 만들며, 성경을 한 책에서도 상호모순되는 가르침들을 담고 있는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심히 훼손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성경을 훼손하고 마는 셈이다.

그들은 또 하나의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은 남녀 동등성과 상호주의의 원칙을 천명하는 바울의 말씀들(갈 3:28; 고전 7:2-16; 11:2-11; 엡 5:21-31, 등)과 그들과 정 반대되는 말씀(고전 14:34-35) 중 후자를 골라잡고 전자를 배격하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수량적으로도 전자가 월등히 우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보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반면에 후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배치되어 겨우 구약의 율법에 호소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 또한 심각한 해석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자의 율법주의의 경향은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롬10:4)의 복음을 저버리고 무엇이나 율법적인 것을 선호하게 하여 심히 불확실한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과 같은 율법주의적 언명을 가장 중요한 금과옥조로 삼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율법의 핵심으로 가르친 사랑의 이중계명과 전혀 무관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등의 말을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이 그렇게 정죄한 율법주의적 태도로 고수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결국 복음의 첫 설교자들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등 여자들을 범법자들로 만들고 그들이 설교한 복음을 무효화하며, 심지어 그들을 복음의 첫 설교자들로 내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 자신들의 귀중한 법(“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을 어기도록 교사한 분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올바른 해석학이 중요하다

다른 문제들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렇지만, 남녀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해석할 때, 해석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몇몇 구절만 인용해서 그들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야 한다. 특히 원칙적이고 중심적인 가르침과 문화적이고 주변적인 요소들을 구분하여 해석해야 하며, 성경 말씀의 문자보다는 그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후 3:6). 그러므로 예컨대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중 어느 구절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더 정확한 표현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남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과 새 창조의 복음을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반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14장 34-35절,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등은 여성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자유를 너무 지나치게 행사하여 옷차림이 너무 야해지는 것이나 너무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으려는 다분히 비본질적이고 상황적인 권면들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해석학적이고 신학적인 판단을 못한 채 사본학적으로도 불안하고 내용적으로도 이차적임에 틀림없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또는 후대의 디모데전서 2장 11-15절 등의 본문들만을 율법적으로 고집하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완성된 계시인 신약을 저버리고 예비 계시였던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성전 예배 의식에서 여성을 완전히 차별하는 규정들을 들이대며 오늘의 교회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을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칼빈주의자들로 자처하는데, 남자의 권위를 세우고 여성을 굴종시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구약의 의식법에 호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구약의 의식법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만인사제론을 편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남편/아버지만의 제사장론을 펼치듯이 말이다. 여기에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씁쓸한 역설이 있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를 보수한다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 진리를 왜곡한다.

여성들을 굴종시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여성을 굴종시켜 하나님 나라나 가정에 무슨 유익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여성들에게도 많은 은사들을 주셨고, 신약시대 이래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은 막대한 것이었다. 19세기 이후 근세 선교역사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보라. 만일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엄격히 적용하여 여성들로 하여금 사역하지 못하게 했다면 근세 선교역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여성을 일방적으로 굴종시키는 것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려니와, 그들에게도 그의 교회를 세워 올리도록 주신 은사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 많고 큰 성령의 은사들을 낭비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의 남녀 동등성에 관한 가르침과 여성 리더십 행사의 모범들을 적극적으로 음미해서 오늘 우리의 교회 안에서 여성의 리더십 참여를 공식화해서 허용하면 건전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올리는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굴종시키려고 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는가?

교회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할 때는 항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을 가져왔고, 약자를 보호하였으며, 만민의 인권을 증진하였다. 한국에서도 반상 철폐, 여성 해방, 인권 증진, 민주화 등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이 영광스러운 역사만 자랑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유교의 족쇄를 풀고 여성의 해방을 가져온 교회가 이제는 남자의 가부장적 리더십과 여자의 순종을 강조하여 사실상 유교 윤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버렸다. 각급 학교들에서 활약하는 여자 선생들이며, 여자 국회의원들이며, 여자 장관들이며, 여자 판검사들이며, 신문사들의 여자 논설위원들이며, 기업체들의 여자 사장들이며,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성 리더십이 약진하고 있다. 사회의 다방면에서 여성 리더십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유독 교회 안에서만 여성 리더십이 거부되고 있다. 여성 해방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만, 한 때 이 땅에서 여성 해방을 주도한 교회 안에서만, 여자들이 잠잠하라고 억눌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또 얼마나 씁쓸한 역설인가?

지금 우리는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놓여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여성을 굴종시키는 이슬람교와 약자들을 노예화하는 힌두교의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 차별, 신분적 차별, 그리고 성적 차별을 철폐하고 만민에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확대해야 하는 구원사적 소명을 받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잘 표현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 대로 복음의 사회적 실현을 가져옴은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위협받고 있는 우리 기독교 문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 저작권 관계상 전문을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김세윤 교수의 전문은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두란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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