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bucco-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Giuseppe Verdi 쥬셉베 베르디 (1813~1901)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인 론코레의 여관집 아들로 1813년 10월 10일에 태어났습니다. 집은 가난하고 옹가와 가까웠기 때문에, 농민으로서의 소박한 기질이 그의 일생을 좌우하고 있었지요. 어릴때부터 음악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였고, 마을에서의 바이올린 소리와 교회의 오르간 소리에 마음이 끌리어, 7세때에 교회에서 미사반주를 하여 그의 음악적인 소질을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그뒤로는 스승을 만나서 공부하였고, 10세때에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는 한편, 근처에 있는 마을의 학교에서 2년간 음악공부를 하였습니다. 15세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고, 18세때에는 그의 스승 바레찌의 원조로 밀라노로 갔습니다. 시골출신인 그의 입학자격 연령인 14세를 넘었기 때문에 입학할 수 없게되어, 한때 실망하였지만, 리비나에게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하였죠. 1836년 은사 바레찌의 달 마르게리라와 결혼하고 밀라노에 정주하였답니다. 1839년 최초의 오페라 <산 보니파키오의 백작 오베르토>를 써서 스칼라좌에서 발표하였는데 대단한 성공은 아니었다고 하네요. 다음 해에 <왕국의 하루>를 작곡하였는데, 이때에는 그의 부인과 두 아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대문에 불행한 날을 보내고 있었기때문이죠. 너무나 실망이 컸기때문에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었지만, 친구들의 격려로 힘을 얻어 오페라 <나부꼬>를 작곡하여, 마침내 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디디게 되었답니다. 그뒤부터 차츰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룸바르디,>,<에르나니>등의 애국적인 작품을 4년간 계속하여 4편이나 작곡하였습니다. 1847년에는 <마크베르>를 발표하여 새로운 음악극으로 호평을 받았고요. 그후 영국에가서 <군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한편 <리골렛토>,<일트로바토레레>,<라트라비아타>,<아이다>등으로 온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지만, 60세가 넘은 후에는 바그너의 관현악법을 연구하여 일대 전환을 하였답니다. 전 4막으로 구성되는 오페라 나부꼬는 성서에 나오는 영웅 바빌론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야기를 솔로라가 각색한 것으로,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었죠. 아내의 사망과 오페라 《하루만의 왕》의 실패로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던 베르디가, 뒤에 결혼하게 되는 조세피나와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밀레리의 격려 속에 작곡한 이 오페라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특히 3막에 나오는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으로 오늘날 더욱 유명하죠. 베르디 자신이 “이 오페라는 행운의 별 아래 태어났다”고 술회했듯이 이 작품의 성공은 그의 이름을 전 유럽에 떨치게 하였답니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를 달고…. 비탈과 언덕에서 날개를 접어라. 그곳은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 조국의 공기가 향긋한 곳. 맞이하라. 요르단 강둑과 무너진 탑 오, 내 조국, 빼앗긴 내 조국…" 1842년 3월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의 가슴에 큰 감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포로 유대인들과 같은 처지로 여기며 눈물로 공감한 관객들을 통해 국가처럼 불려지게 됩니다. 결국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조국을 잃고 핍박 속에서 희망을 꿈꾸던 히브리인들의 아픔과 베르디의 아픔의 공음이었고, 또 그렇게 밀라노의 사람들에게 공감된 것이었습니다. |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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