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일반

[스크랩] 세속화 신학(Secular theology)

춘천 김상호 2009. 8. 17. 06:54

세속화 신학(Secular theology)
세속화 신학은 타계적 경건주의와 내성적 기독교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의 내재성을 초월성보다 강조한다.
 
본회퍼(1906-1945)
 "X께서 한 인간을 부르실 때는 그에게 따라와 죽으라고 명하신다"라고 말한 것처럼, 본회퍼는 순교의 삶을 살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즉 기독교가 삶의 의미에 대해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뇌 속에서 그는 교회인과 'the men of the world'에게 이야기한다. 교회인들에게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라, 즉 교회를 교회가 뜻하는 바 "X-existing-as-community"로 만들라고 하며, 세속인들에게는 성숙해질 것을, 인간의 모든 잠재능력들을 충분히 발전시킨, 특히 인간의 자유의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시킨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진리의 삶을 살도록 도전하고 성숙한 삶을 요구하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각기 그 현재적 과제를 성취하려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Eberhard Bethge는 그의 중심사상을 'a continually growing awareness of the concretness of revelation'으로 이해한다. 그의 사상의 편력은 그의 인생의 편력과 병행하며, 이들은 계시가 삶 그 자체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데에 중심한다.
 
계시의 본질
 Sanctorum Communio, Act and Being :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로 선택하셨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심을...자신을 역사적 인간에게 얽매이도록 선택하셨음을...자신을 인간의 처분받을 자리에 두셨음을...영원한 비객관성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교회 안의 그의 말씀 가운데서 '가질 수 있고' 파악될 수 있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니은 자신을 계시하시며 이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인간에게 유용하게 만드신다
 
. 하느님의 유용성 인간을 위한 그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독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공동체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교제 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반영되어 있는 신의 계획이다. 그러나 "죄의 현실은...개인을 극단적인 고독 가운데, 하느님과 인간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된 상태 속에 가져다 놓는다." 이와 같은 상태로부터의 구원은 공동적이다.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는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의 창조이다.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까닭에 이기적 존재의 굴레로부터 해방받은 성도의 공동체이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인 교회는 'the locus of humanity's restored community, the iocus of redemption'이므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느님과 인간과의 교제의 산 표현이고, 그리스도의 사업의 열매가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원천이다. 교회의 전체 기능은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로서 말씀이 완전히 성육화되는 것을, "Christ revealed as community"가 되는 것을 의도한다.
 
"being of God in revelation"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시는 어떻게 알려지는가, 행동으로서의 신앙과 존재로서의 계시의 상호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계시는 한 행동의 수행 속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가 아니면 계시에서는 인간을 위한 존재가 있는가 ? 계시를 행동의 측면에서 묘사할 때, 하느님은 일련의 행동에 의하여 특수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다라고 이해한다(Barth's act theology). 계시를 존재의 측면에서 묘사할 때, 계시의연속성이 강조되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일련의 계시의 수용자가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계시 안의 존재라고 이해한다(Tillich's being theology). 전자는 인간으로부터의 하느님의 자유를 보존하고,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본회퍼는 후자의 접근방법을 선호한다.
교회 안에서 계시에 관한 "행동적"사고와 "존재적"사고의 가치는 살아있는 통일성 속에서 서로 묶여있다. 교회는 그 존재성을 교회 안의 신앙 헹위와 신자의 계시 소유에 의존한다. 'the Christian communion'가 하느님의 최종적 계시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창조되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공동체,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을 "...새로운 인간 - 아니 그보다는 새로운 인간성 그 자체"로 계시한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계시의 연속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계시가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장소이다. 교회 속에서 계시는 스스로 존재와 행동임을 계시한다.
 
계시의 구체성
 Nachfolge(The Cost of Discipleship)
본회퍼는 이 책에서 'an existential embodiment of thought in action'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아직도 'radical religionlessness'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은총의 소유자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어떤 다른 면모를 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Luther의 'sola fidei'의 원리가 자기만족적인 진부한 생활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으로 타락하여, 은총은 하나의 교리·원리·체계로서, 죄인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동반하지 않는 죄의 정당화를 뜻하는 "값싼 은총"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비난이다. 반대로 "값비싼 은총은 다시금 다시금 추구되어야 할 복음이요, 요구를 지닌 선물이요, 인간이 두드려야 하는 문이다...그것이 은총인 까닭은 그것은 우리에게 JX를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고,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는 까닭에 은총이다. 그것은 죄를 단죄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고 그것이 죄인을 의롭게 해 주기 때문에 은총이다."
 
은총과 제자직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세상가운데 사는 길이다." 순종하는 신앙인은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와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라는 역설적 성격을 함께 공유하고 생활화한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제자직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오직 그리스도만 알고 자신은 알지 않을 것과 오직 앞서 가시는 그분만을 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어려운 길은 보지 않을 것"을 말한다. 또한 이 길은 새로운 교제의 시작이고, 나의 이웃과 나 자신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한다. 기독교 제자직의 비범성은 "세상에 살면서도" 예수처럼 사는 것('a life of suffering love')을 뜻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은폐된 것, 특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감추어지고, 십자가의 삶에로 자신을 신앙 가운데서 내어주어야 한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말씀을 듣는데서 그가 영위하는 삶으로 그의 동료들과 차이를 나타내지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우정으로, 예수의 사랑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들에게로" 다가간다.
 
은총과 제자직이 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죽음이요, 예수 안에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이다. 성육하신 하느님의 아들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인간성으로 존재하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 모든 연약함과 죄와 부패와 더불어 배신적인 인간 본성 전체를 취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안에서 전체 인류와 더불어 수용되는 JX의 몸은 이제 우리의 구원의 터전이 되었고, 그 몸(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서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갖는 연대성이 기본적인 인간적인 문제, 연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신적인 대답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의하여 하느님의 새로운 형상을 입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는 것은 먼저 "그의 수치스러운 형상"을 따르는 것이다.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분신이 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지녔던 전체 인간성을 나누어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결과인 개인주의로부터...전 인류와의 연대"로 회복 된다.
 
타자를 위한 실존적인 존재 - Ethics
책임적이고 자유로운 기독교인의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윤리학}에서 그가 제안하는 인간형은 지혜와 단순성을 겸비한 인간이다. 단수난 인간은 그의 시선을 하느님에게만 고정시키면서, 날마다 하느님의 계명과 심판과 자비를 듣는다. 그는 자신이 "원칙의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묶여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단순한 사랑은 지혜로운데, 그는 "하느님 안에서 현실을 이해한다." 지혜롭고 단순한 인간은 하느님과 그의 세계가 조화로운 일치 가운데 함께하는 자리, 즉 JX의 인격 안에서 자신의 도덕적 자아를 형성하는 길을 찾는다. 이 도덕적 형성(moral formation)의 세가지 구성요소는 성육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닮는 것(conformation)이다. 교회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시키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교회는 인간들 가운데서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인간의 무리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취하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신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추상적·결의론적(casuistic)·강령적(programmatic)·순수사변적이지도 안은 방식으로" 자기자신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여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인에게 진정한 윤리적 문제란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문제이고, 이는 'Christ without the world'나 'the world without Christ'이 아니고 "그 자체 내에 세상의 현실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義認인 궁극적인 사항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주의로써 인간의 모든 일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강조한다. 또한 타협의 입장은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은 그 자체의 권리를 보유하고, 궁극적인 것인 의인은 일상생활에서 물러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의 입장보다 기독교인은 오히려 "성육신의 효험을 통하여 인간이 되고, 십자가의 효험을 통하여 선고를 받고 용서를 받으며, 부활의 효험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준궁극적인 일은 인간이 되는 일과 선하게 되는 것이다. 준궁극적인 일은 궁극적인 일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대리직과 책임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이는 자신의 이웃과의 관계의 모든 구체적인 관계에서 그리스도 처럼 행하는 "책임적인 역사적 행동"이다. 책임은 창조·속죄·구속이라는 긍정과 정죄·죽음이라는 부정의 삶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적 인간의 행동은 그것만이 자유를 주는, 전적인 자유를 주는 책무, 곧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책무 가운데서 수행되어진다. 기독교인의 모든 선택에는 자유와 순종이 혼합되어 있다. "자유없는 순종은 예속이요 순종 없는 자유는 자의적인 자기 뜻"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도덕 생활의 열쇠는 예수요 예수의 형상을 기독교인이 본받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화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절대권력과 절대선의 지고한 존재,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인간 실존의 경계들"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한다. 성인이 된 현대에 있어서 삶의 한계 상황들에다 하느님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하느님은 삶의 중심에 놓여져야 하고, 그리고 구원은 인간 역사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들 한가운데 계시는 초월자"가 된다. 이 하느님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하는 고난받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이 진정한 교회가 된다. 이는 비종교적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남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JX가 그 초점이되고, 그 교회는 구체적인 본보기로서 예수를 따라야 한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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