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80.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순”은 누구이며 “평화의 의논”을 하는 둘은 누구인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서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슥 6:12-13).
이 본문은 구약에서 메시아의 신분과 역할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소위 메시아 구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은 그 메시아의 이름이 “순”(Sprout)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제사장인 그가 왕이 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겠다고 하였다. “순”은 누구인가? 왜 제사장이 왕에 오르는가? 그리고 “평화의 의논”을 나누는 “두 사이”의 “둘”은 누구인가?
먼저, 여기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은 전형적인 신탁 문장으로 정관사 없는 네 개의 히브리어 단어 힌네이-이쉬 체마 세모(וֹמ שׁיאּ-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절을 단어 순서대로 번역하면 “보라, 남자, 순, 이름으로”이다.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구절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 관하여(about)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에게(to)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메시야를 예표 하지만, 이 신탁은 여호수아의 관심을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에게로 끌고 간다. 특히, “보라...사람” 이란 표현은 수난 주간에 본디오 빌라도가 내 뱉었던 저 유망한 말 “보라, 이사람이로다”(라틴어, Ecce Homo, 요 19:5)를 연상하게 해 준다.
그러면, 이 “순”이 누구일까? 12절은 이 “순”의 신분에 대해 알려 준다. 이 “순”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의 싹”이란 뜻을 지닌 스룹바벨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저 표상적인 하나님의 “순”(a sprout)일 뿐, 결코 그 순(the sprout)이 이나다. “순”이라는 히브리어 체마(ח)는 메시야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동의어로는 이사야 11:1의 “싹”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호테르(ד)와 “가지”라는 네체르(ד)가 있다. 사실, 이 체마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제사장과 왕의 직분의 연합을 나타낼 때 사용된 기술적인 용어(technical term)이다. 예레미야는 이 단어를 메시아-왕(messiah-king)의 도래와 관련하여 “의로운 가지”(체마 챠디크, י ח)란 표현으로 두 번이나 사용하였다(렘 23:5; 33:15).
“순”의 출신을 가리키는 “자기 곳에서”란 말의 히브리어는 미타흐타우(וי)인데, “낮은 곳”을 의미하는 타하트()에서 비롯되었으며, 문자적 의미는 “낮은 곳으로부터”이다. 이것은 메시아가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사 53:2)다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비천한 출신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동시에, 이 단어는 “순”이 “자기 곳” 즉,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씨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의 13절은 그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 전은 “여호와께 드리는 전”(a temple to Jehovah)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the temple of Johovah)이다. 그러므로, 이 전은 왕-신(king-God)이신 여호와가 거하는 여호와의 “왕궁 신전”(palace-temple)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은 “순”이라 이름하는 메시아에 의해 건설될 것이다.
그런데, 15절은 “먼저 사람이 와서” 이 전 안에서 [우리 말 성경에는 “전을”이라고 번역되었으나 히브리어 브헤이칼(לי)의 정확한 번역은 “전 안에서”이다] 건축할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모든 먼데 사람”은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행 2:39)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전은 “순”이 건축하고, “먼데 사람”이 그 안에서 건축하는 그런 전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메시아에 의해 건축되고 이방인을 포함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는 교회를 의미한다. 엘렌 G. 화잇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당신의 희생과 중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와 건축자가 되신다”(GC. 415).
그런데,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는 이 구절은 12절에 이어 13절에 또 한번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역본들은 이런 반복은 필사자의 실수 때문이라고 하며, 그 중 하나를 생략한다. 시리아 역은 12절의 이 부분을 생략하고 [70인역]은 13절의 이 부분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본문을 변형하는 것이다. 다른 증거가 없는 이상 우리는 맛소라 본문(MT)을 그대로 사용하여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절에 나타나는 대명사 “그”이다. 비록 한글 [개역 성경]에는 대명사 “그”가 한번밖에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대명사 후(אוּה)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와 “영광을 얻고” 앞에 반복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12절의 건축은 여호수아에 의한 것이고 13절의 건축은 순에 의한 것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 증거는 불충분하다.
한편, 뷰켄(Beuken), 액크로이드(Ackroyd), 존스(D. R. Jones) 등은 스가랴가 이 절에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번갈아 말했다고 생각하였다(WBC, 32:216). 그들의 견해를 따라 13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스룹바벨>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그<여호수아>가 영광도 얻고
그<스룹바벨>가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그<여호수아>가 자기 위에서 제사장이 되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구분은 발드윈(Joyce G. Baldwin)의 지적처럼 충분한 무게를 갖고 있지 못하다(TOTC, 24:135).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절이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대명사 후(אוּה)의 반복은 강조를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파인버그(Charles Lee Feinberg)는 이러한 대명사의 반복은 사실의 확실성, 인물의 중요성, 임무의 위대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BS,99:175).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는 “메시야”를, “전을 건축”하고 “다스리는” 일들은 그가 수행할 “두 직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장차 올 메시야는 진정한 대제사장이요 진정한 왕이 되실 것을 의미한다. 그 메시야가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다 .여기 언급된 “위” 즉, 보좌는 앉아서 다스리는 왕의 보좌이다. 이것은 스가랴가 미래에 관한 계시에서 야훼의 우주적 통치권을 내다 본 것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가 “왕중 왕이시며 만군의 주”이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또한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라고 하였다. 제사장이 보좌(킷세, א)에 앉는다는 본문의 진술에 대해 많은 주석 가들이 당혹감을 느낀다. 그래서 70인역(LXX)은 이 본문을 “그의 우편에 제사장이 있으리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제사장이 보좌에 앉는 다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해서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철자상 “위(位)에”(알키소오, ואסכלצ)룰 “우편”(알 야미노, ובימי לצ)으로 잘못 볼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제사장이 왕이 되거나 혹은 보좌에 앉는 이러한 일이 여기에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다(창14:18; 시110:2-4참조) 또 우리 말 성경은 “의자”라고 번역하였다만 , 사사 시대의 제사장 엘리는 킷세에 앉아 있었다.(삼상1:9;4:13,18), 사무엘상 1:9은 엘리의 킷세가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에 있었다고 말한다. 성경 시대 성전 문은 모든 재판을 집행하는 장소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의미심장한 진술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제사장으로서 사제권뿐만 아니라, 통치자로서 사법권까지 행사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보좌는 “순”이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함께 수행할 것을 알려주는 구절이다. 여기 “위”가 두 번 반복된 것도 이 사상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13절은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한다. 여기 “두 사이”의 둘에 대해서는 수룹바벨과 여호수아, 왕직과 제사장직, 성부와 성자라는 이해가 가장 일반적인 의견들이다. 먼저, 이 둘을 수룹바벨과 여호수아라고 이해하는 것은 13절 전반부의 대명사 “그”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번갈아 가리킨다고 이해할 때는 문맥에 맞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러한 해석은 문맥상의 증거가 없다. 13절의 “그”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두사이”는 메시야가 감당하게 되는 “두 직분 사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이 문맥 속에서 일차적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뜻은 왕직(kingship)과 제사장직(priestship)이 한 사람(a Man)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통일과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재림교회 성경주석은 “그리스도도 왕과 제사장의 이중 직분을 행한 멜기세덱과 같이...제사장이 되시고 결국에는 ‘그 조상 다윗의 위’(시110:4)에 오르실 것이다”(SDABC, 4:1099)라고 하였다. 엘렌지 화잇도 예수께서 “하늘 성소의 봉사로써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을 이루셨다”(GC, 417)고 하여 “평화의 의논”으 이루기 위해 예수의 대제사장직 봉사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엘렌지 화잇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 “두사이”를 성부와 성자의 사이로 설명하였다.
“성자의 사랑보다 약하지 않은 아버지의 사랑이 타락한 인류의 구원의 기초가 된다”(GC, 416-417).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둘의 인격은 이 성경 절에도 명백히 나타나 있다“(9T. 269).
물론 이러한 이해는 엘렌지 화잇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메튜 헨리(Matthew-HENRY)도 이 절의 주석에서 이 두 사이를 “여호와와 순이신 사람 사이,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이 구절을 좀 더 광범위한 조망을 통한 성서적 신학적 해석의 결과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