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4절-5절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세상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보면 조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1복음 즉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에 대하여는 세상적인 기준으로도 겸손한 사람이 칭찬을 받고 또 그 만한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제2복 즉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또는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은 세상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삶을 권장하는 의미에 있어서 슬픔을 빨리 잊어라 나쁜 생각은 빨리 떨쳐버리라고 충고하고는 있습니다. 또한 애통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여야하고, 애통하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하고, 깊은 위로의 말을 하여 다시 일어날 용기를 주어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만,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하고 또 우리의 부러움을 사야 할 사람이라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애통하고 또 애통하는 자를 부러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25절에 보면 더 지독한(?) 말이 있습니다.
25b -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즉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웃는 자에게 저주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에 대한 암시는 구약에 있습니다.
이사야 61:1-3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에스겔 7:4절입니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또 아모스 6:6절입니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마태복음 5:4절에서 말하고 있는 애통하는 자들에 대한 암시입니다.
이미 위의 성경을 읽어보심으로 인하여 복이 있는 애통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할 것입니다만,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 애통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애통인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의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에 대한 구체적인 대상은 영적인 것에 대한 애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개인적인 죄에서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깊은 슬픔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애통을 포함합니다. 또한 이것은 사회적인 부조리에 대한 깊은 애통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가슴 아픈 애통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정말로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사망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애통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애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개인적인 욕심이 충족되지 않아서 생겨나는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이 충족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한 애통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살펴보시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33-3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마리아의 집에 가서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and troubled) 눈물을 흘리시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전혀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애통입니다.
즉 그것은 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지를 예수님은 아시기 때문이 예수님의 애통은 그 사실에 대한 애통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9:41-44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의미는 왜 예루살렘이 망할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의 애통하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가져야할 애통함은 바로 이러한 애통함이어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7장 전체를 읽어보시면 바울의 애통해하는 심령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18절 처음과 그리고 24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I know that nothing good lives in me,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이것은 바울의 어떤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겨나는 그러한 애통이 아닙니다.
정말 바울이 애통해하는 바로 그 이유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이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서 우신 이유이며 또한 예루살렘의 성을 바라보시며
애통해하신 이유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8복의 제1복은 무엇을 자꾸 버림으로서(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에 대한 과신을 버리고...등등) 얻는 복이라면 제 2복은 마음에 자꾸 무엇으로 채워야
더 풍성하게 받을 수 있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애통함으로 채우면 채울수록 그 만큼 더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기 죄에 대한 애통함은 많으면 많을수록 깊은 회개를 할 수 있게 하여 그의 마음이 비워져서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 채워지어 그 만큼 더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힘을 잃고 있는 이유가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교회가 사회를 바라보고 또 개인을 바라보고, 정말 애통해야 할 것을 애통해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인용한 말은 어떤 분이 쓰신 ‘눈물’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울어야 할 때이며 이 땅은 울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무릇 눈물을 한 쪽에 제쳐놓은 사람은 세상의 실태를 알지 못하며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이미 그의 사람됨의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참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생의 참된 의미이다.’
교회는 사회를 바라보고 이런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정말 내 이웃을 바라보며 이런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진정 애통하는 마음이며 이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위로를 주십니다.
정말 슬퍼하고 애통해야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애통해 하십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온유하다는 뜻은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어 사전에 나와 있는 온유하다 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제가 8복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 8복의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연적으로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성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즉 마태복음 5장 5절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성격이 온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생겨나는 성격입니까?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온유하다는 말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의미하며, 항상 독하지 않고 모나지고 않고 부드러우며 너그러운 것을 의미하며, 또한 모질게 적극적이지 아니함을 의미합니다.
즉 심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의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별하여야 할 것은 힘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겸손한 것이 아니며 또한 힘이 없기 때문에 부드러움이 아니며, 특히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나서지 못하고 적극적이지 아니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유약한 사람은 아닙니다.
또한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도 하지를 못하는 사람 또는 어떤 경우에는 지나칠 정도로 비굴하게 굽실굽실 거리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 하지 않습니다.
헬라적인 온유의 뜻은 사나운 짐승이 잘 훈련되어지고 길들여져서 다루기 쉬운 짐승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길들여지었다고 하여도 야수의 본성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틀 같은 철학자는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낼 줄 안다. 그러나 정당한 대상을 향하여 정당한 정도와 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선천적인 힘과 능력과 자신감이 적절하게 제어될 때 나타나는 성격이 온유한 성격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이 잘 나타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5절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는 ‘겸손하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본래의 뜻은 마태복음 5:5절에서 사용된 같은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여 ‘온유하여’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과 힘으로는 나귀보다도 더 좋은 것을 타실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은 겸손하여(온유하여) 나귀를 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이 더렵혀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참지 못하시어 불같이 화를
내시고 채찍으로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온유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구약에서는 다윗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이유 없는 핍박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이리 저리 도망 다니고 있었던 다윗이 어느 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일 수가 없다는 이유로 자기에게 주어진(?) 그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테판 집사님은 어떻습니까?
최초의 선교사 바울은 어떻습니까?
이들은 모두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온유의 뜻이 무엇인지 정리해 볼까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유한 성품은 태어난 성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격은 기독교인인 된 후에야 가질 수 있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는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절대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바울은 정말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선천적인 성격이 적절하게 제어되어 새로운 성격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하다 즉 매사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하여서 게으르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이 매사에 온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것이 아니라 게으른 성격일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이라 함은 우리말에서 사람이 좋다 즉 좋은 사람이다 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저 사람은 ‘정말 사람이 좋다’라고 할 때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
바보스러운(?과장해서)성격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는 자기 의견이 전혀 없이 이렇게 해도 좋다고 하고 또는 저렇게 해도 좋다고 하며, 전혀 이의를 달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 다윗, 그리고 바울이 그런 분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를 주장하지도 않는 즉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 즉 힘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에 항상 남의 주장에 끌려 다니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굉장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은 있으나
그 마음에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그런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의 편에 항상 서 있는 사람이며, 또 진리를 지키는 자이며, 더 나아가 진리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한마디로 말하면 활활 타오르는 열정이 있지만 그것이 억제되어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어서, 겉으로는 다만 겸손함과 부드러움만이 나타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이 온유에 대하여 아래에서 읽을 성경은 너무나 아름답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8-25절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5:5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읽을 것입니다.
힘을 절제하고 제어하여 겸손하고 너그러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것이 온유한 사람에게 내리는 상급입니다.
시편 37: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온유한 사람이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격이 느슨해집니다. 즉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화를 결코 내어서는 안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화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제어된 화이어야 합니다.
즉 내가 화를 낼 때 나의 감정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로 바른 시간에
바른 장소에서 그리고 화를 내야할 바른 대상에게 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빠져서 여러분의 성격이 온유하게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