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헤롯대왕의 무덤발견과 계보들
King Herod's Tomb Said Found Near Jerusalem
예루살렘 근처에서 헤롯대왕 무덤 발견
2007년 5월8일
헤브라이 대학 교수 에훗 Netzer는 그의 고고학 발굴 팀들과 함께 30년 이상 발굴한 헤롯 대왕의 나머지 무덤을 발굴했다.이번 발굴은 이스라엘의 엄청난 고고학 미스터리들 중 하나를 푸는 장대한 쾌거로서 예루살렘 남쪽 대략 9마일(15키로)에 만들어진 헤롯 대왕의 무덤인 것이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헤롯 대왕의 무덤 전경과 발굴현장
많은 학자들이 헤롯이 헤로디움에 묻히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지만 이번 발굴을 통해 웅장한 무덤의 주인이 확이되엇다.
B.C37-4세기부터 헬륨으로부터 유대(지금의 남부 이스라엘 일부분과 팔레스타인지역)의 지역 곳곳을 로마로부터 임명받고 통치한 지배자들이 자기 과시욕으로 많은 공사를 시행했었다.그 예가 예루살렘의 유대인 사원.가이샤라의 도시.그리고 마사다의 고원의 정상에 궁전과 성채들을 포함하여 치밀하게 건축하고 관리했다 그 무덤의 부산물인 헤로디움의 무덤은 웅장함이 당대 최대였다.
sarcophagus헤롯 대왕의 석관
이 삽화는 그의 무덤에있었던 석관 파편들을 근거로 하여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이 석판의 종류는 유대인 상류층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석판이다
헤브라이 대학교 교수 에훗 Netzer
헤롯 왕의 나머지 무덤 발굴로 전세계의 사람들과 고고학자 기독인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유대 역사가 요세프스의 저서에도 나와 있듯이 헤롯과 예수님의 관계는 때문에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지대한 흥분을 느끼게 했다.
헤롯 대왕의 것으로 여겨지는 화장된 신체들의 유골을 저장하기 위하여 사용된 특별한 항아리들이 발견되었다.
헤로데스 [Herodes, BC 73 ?~BC 4]
유대의 왕(재위 BC 37∼BC 4). 친로마 정책과 전제정치로 유대 왕국을 크게 발전시켰고,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하였다.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근절하려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마저도 죽였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많은 유아를 살해하여 잔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대왕(大王)으로 통칭된다. 이두마에아인 안티파테르의 아들. 젊은 나이에 갈릴리의 지배자가 되었고, 하스몬가(家)의 안티고누스가 파르티아의 지원으로 유대왕이 되었을 때, 로마를 배경으로 유대왕의 칭호를 얻은(BC 40) 뒤 안티고누스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 명실상부한 유대왕이 되었다.
친로마 정책과 전제정치로 유대 왕국을 크게 발전시켰고, 예루살렘 신전(神殿) 재건을 비롯하여 성채 ·항만 ·극장 등을 건설하였다. 하스몬 왕조의 혈통을 근절하려고 하스몬 사람인 아내 마리안을 비롯하여 자신의 아들마저도 죽였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의 많은 유아를 살해하였다. 그 때문에 잔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헤롯 가문
B.C. 63년 동방이 로마제국에 편입되었을 때 폼페이는 힐카누스라는 한 제사장을 세워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와 베레아를 다스리게 하였다. 힐카누스는 교활한 신하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그 신하는 이두매사람 안티파테르였다. 안티파테르는 자기의 세력을 그의 가족에게 유리하도록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아는자였다. 그는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롯을 요직에 앉혔다. B.C. 43년에 안티파테르가 살해당했을 때 그 두청년은 힐카누스의 조정에 대신으로서 공동참예할 수 있게 되었다.
파사엘은 국경을 진정시키고자 했던 율리오 가이사(JULIUS CAESAR)가 찬탈당한 뒤에 있은 파르디아 족의 침입시에 곧 희생당하고 말았다. 헤롯은 로마로 도망하여 옥타비안(미래의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감명을 끼쳐서 팔레스타인을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이 명령을 B.C. 39-36년 어간에 수행하였다. 그는 34년간 로마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행정을 맡아 성공적으로 관장하였고 그 동안에 가이사랴에 로마의 항구와 기지를 건설하고 사마리아에 아우구스투스에게 돌리는 신전을 세우는 등 공적을 쌓았다.
동시에 그는 예루살렘에 대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에돔의 피가 섞인 자신을 증오하는 유대인들과 화해를 시도하였다. 그는 뛰어난 외교가였다. 그는 옛 귀족정치를 그 귀족 중 하나인 마리암네와 결혼하였고 관직에 귀족제도를 두었다. 그는 친헤롯 유대당 곧 "헤롯당"을 신설하여 그의 왕가에 충성하도록 유도하였고, 애굽의 톨레미 왕조를 모방하여 관료제도를 세웠으며,용병으로 편성한 군대와 산성과 요새를 세워(그 중 하나가 마사다였다) 그의 권세의 안전을 꾀하였다. 위태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가 치룬 희생은 그의 가족 안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살인을 불러 일으켰으며 끝내는 그로 하여금 피해망상증 환자가 되게 만들었다. 이 자가 바로 예수님 탄생 당시의 유대 왕 헤롯이었다. 새 "경쟁자"에 대한 헤롯의 질투와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은 우리가 그의 성격에 관하여 아는 바와 일치된다.
안티파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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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엘 헤롯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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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켈라오 헤롯안티파스 빌립 아리스토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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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아그립바 I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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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아그립바 II세
헤롯의 뜻은 그가 그처럼 오래동안,그처럼 능란하게 그처럼 무자비하게 다스려오던 나라를 분할하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여자 말다케에게서 난 아들 아켈라오는 가장 좋은 몫인 유대와 이두매를 차지하였다. 같은 어머니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받았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하는 유대 여자에게서 난 아들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과 그 주변의 갈릴리 북동편 땅을 받았다. 재능이 없이 아버지의 악한 면만을 물려받은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혼란을 잔인하게 진압시켰다. 그 결과 더 크고 광범위한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끝내는 수리아 총독 바루스의 강력한 개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아켈라오가 우매한 통치는 A.D.6년까지 계속 되다가 유대인의 항거를 인하여 추방당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유대는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총독은 로마 당국의 직속 집정관이었다). 한편 헤롯 안티파테르(안티파스)는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오래도록 그의 권좌에 앉아 있었다. 디베료가 황제의 위에 있을 동안 헤로디아의 외교적인 솜씨가 그의 꼭둑각시 통치를 지속케 해주었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노한 칼리굴라를 오해하였다. 왕의 칭호를 구한 그는 폐위당하고 유배되어 악명높은 헤로디아와 더불어 호된 고생을 하였다. 이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죽인 헤롯이었다. 그는 또한 빌라도가 재판 중에 그에게로 보낸 예수님을 잠시 대면한 일도 있다.
첫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I세는 로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칼리굴라를 더 잘 다루었고 그리하여 세 형제 중 가장 훌륭했던 빌립이 죽었을 때 그 자리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안티파스가 유배당했을 때 갈릴리와 베레아가 그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A.D. 41년에 아그립바 I세는 글라우디오 황제에게서 그의 할아버지가 다스리던 전 영토를 받았다. 이 자가 바로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헤롯이다. 그는 A.D.44년에 34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그리하여 팔레스타인은 완전히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아그립바 I세는 10대의 아들을 남겼는데 그 아들은 A.D. 48년에 글라우디오 황제에 의해서 갈기스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A.D. 53년에 글라우디오는 분봉왕 빌립과 루사니아스의 영토에 새 성읍 디베랴를 포함하는 갈릴리 서편지역과 함께 이 지역 일대를 덧붙여 주었다. 그러한 영토의 확대편입은 왕의 칭호를 동반하였고 따라서 A.D.53년에 아그립바 I세인 아들은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인 아그립바 II세가 되었다. 그는 사도행전 25장의 놀라운 이야기에서만 나타난다. 거기서 그는 총독 베스도의 손님으로서 바울의 변증을 들었다.